1644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뒤에도 조선에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오래 남아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병자호란의 원한도 있었지만, 청나라가 오랑캐 출신이라는 명분론도 크게 작용했다. 일부에선 2백년 후까지 명나라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을 쓰며 자존심을 달래기도 했다.

 

이웃 조선에서 이럴진대 만주족 지배를 받는 한족의 울분은 더했다. 1729년 증정(曾靜)의 모역 사건은 그런 울분의 표출이었다. 당시 옹정(雍正)황제는 드러난 사건의 처벌에 그치지 않고 반청(反淸)감정의 근본적 해소를 위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반포했다. 청나라는 멸망한 명나라 대신 천하 인민을 돌봐주러 중국에 들어온 것이며,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은 종족이나 출신지가 아니라 천명(天命)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대다수 중국인은 이런 실용주의적 화이관(華夷觀)에 승복했다. 그래서 19세기에 중국에 온 서양인들은 자기네와 같은 민족주의가 중국에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종족의 정체성보다 문명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보이는 중국인의 자기인식 패턴이 민족과 국가를 동일시하던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서양 측의 강렬한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더 특이한 현상이었다. ‘민족국가는 근세 초부터 제국주의시대까지 유럽문명 발전의 강력한 무기였다.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은 극단에 이른 민족주의가 상호갈등을 일으킨 결과라 해석할 수 있다.

 

1차대전 후 국제연맹을, 그리고 2차대전 후 국제연합을 만든 움직임은 이 갈등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극복에 보다 실질적 효과를 가져온 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산이었다.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외친 공산주의와 전 세계의 자본시장 통합을 추구한 자본주의는 민족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데 힘을 합쳤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쓰는 곳에서는 소련과 유고연방 등 다민족국가의 성립과 유지가 가능했다. 공산권 붕괴 후 이들 지역의 구석구석에서 민족분쟁이 꼬리를 무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실종 때문이다.

 

코소보 사태를 둘러싸고 유엔과 나토의 관계전개가 눈길을 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회원으로 하는 유엔은 이데올로기에 초연한 기구인 반면 나토는 자본주의국가들의 연합체다.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천명을 내세워 유엔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자는 나토일까, 미국일까. 199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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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