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경제행위를 선택했을 때, 그 행위의 효용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기대할 수 있었던 효용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좋은 거문고를 만들 수도 있는 오동나무 재목으로 아무리 쓸 만한 절구통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훌륭한 선택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은 날려버린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절구통은 보이는 것이다. 만들어지지 않은 거문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깨진 유리창이론이 절구통만 보고 거문고는 생각지 않는 맹점을 가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지적이다.

기회비용 개념을 제창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바스티아를 선구자로 지목했다. 바스티아의 영문판 <정치경제학 논문선(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1995)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의 서문이 붙어 있다.

기회비용 개념을 이론화한 것은 하이에크의 스승인 프리드리히 폰 비저(1851-1926)였다. 그런데 폰 비저의 이론이 1914년에야, 바스티아의 개념 제기 후 6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경제학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할 이 개념이 이론화되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20세기 초까지 이 개념이 주류 경제학계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화가 늦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왜 중시되지 않았을까? 여기에도 19세기 후반 유럽의 낙관주의가 한 몫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회비용 이론은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자원 공급이 무제한이라고 인식한다면 기회비용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온 산에 오동나무만 있고 다른 나무가 별로 없는 곳에서는 가야금 만들려고 오동나무 재목을 아낄 필요가 없다. 절구통 아니라 부지깽이, 밥주걱까지 전부 벽오동으로 만들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정치가들에게 자원의 희소성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과학의 발달이 자원 공급을 무제한으로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당장의 수요는 식민지 개척이나 적국의 약탈로 충족시킬 길이 있었다. 획득하는 방법만 궁리하면 됐지, 아껴 쓰는 방법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경제학계에도 자원의 희소성을 걱정할 동기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를 통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제도주의가 사회조직방법의 대안으로 제기된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낭비성이 인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기술과 경제가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민의 생활이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문제가 갈수록 분명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한쪽에서 위기의식이 자라나고 있는 동안에도 주류 경제학계는 무한 진보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폰 비저의 스승 카를 멩거(1840-1921)의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이론과 폰 비저의 기회비용 이론 등 초기 오스트리아학파의 활동은 경제학 연구를 냉엄한 현실조건에 접근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오스트리아학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밀튼 프리드먼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원흉으로 꼽히는 하이에크는 다음 세대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고전적 자유주의의 본산으로 흔히 인식된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란 말에 짚어둘 점이 있다. 1920~30년대에도 신자유주의란 말이 유행한 일이 있고 폰 비저가 그 대표적 인물의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이것은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원래의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사회주의 통제경제와의 절충을 시도한 중도적 입장이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비슷한 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멩거와 폰 비저 등 오스트리아학파의 초기 지도자들이 경제 영역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반대하고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한 것은 당시 제국주의시대의 지나친 국가 개입이었지, 후세의 신자유주의처럼 국가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계량화를 통해 경제학을 정밀과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였고, 국가의 경제정책에 관심을 집중하지도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들의 기술만 배우고 정신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학파의 역할이 이상하게 된 것 같다.

 

 

<자본주의 이후>에는 내 생각의 윤곽만 그려놓고 그 생각의 바탕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주석'의 형태로 관련된 생각을 더 정리해 보려 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