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체제는 해방 직후 미-소의 분단점령으로 틀을 짜기 시작해서 1948년 8-9월 남북의 정부 수립으로 완성되었다. 큰 틀은 그 후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실제 양상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고, 동구공산권 붕괴 직후인 1990년대 초반도 한 차례 큰 변화의 계기였다. 어떤 변화였던가, 분단체제 성격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1950년대 분단체제의 남측 주체는 남한보다 미국이었다. 냉전체제의 한 부분으로서 한국의 분단을 미국이 필요로 했고, 미국의 지원에 기대어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친일파 집단은 남한 사회 내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권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북진통일’이란 이름으로 대결을 정당화했다. 인민의 통일 열망은 폭압적 정책에 억눌려 있었지만, 조봉암의 ‘평화통일’ 노선에 대한 열렬한 호응으로 나타났다. 4-19혁명 후 통일운동의 분출은 폭압이 사라진 상황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5-16쿠데타로 폭압이 복원되어 표면적으로는 1950년대 상황으로 돌아갔지만 대립 상황은 북한이 우세한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 건설에서 앞선 북한은 4-19 이후 드러난 남한 민심에 자신감을 얻고 ‘평화통일’ 선전에 힘을 더했다. 국제관계에서도 비동맹운동의 발전이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미국이 마음 놓고 이용했던 유엔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도전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한반도와 비슷한 틀로 미국이 매달려 있던 베트남의 전쟁은 점차 미국이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남한의 베트남 파병과 북한의 무력공세가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냉전의 틀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비자본주의 국가를 모두 적대시하는 오만한 자세로 국제사회에 임했다. 그런 극단적 독단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된 미국은 ‘적’의 범위를 좁히고 적대의 자세도 누그러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과의 수교를 비롯한 데탕트에 나서게 된다.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체였던 두 나라 사이의 화해는 그때까지도 두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남북한의 입장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틀에 전쟁 이후 최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홍석률은 그 윤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서 격돌했던 미국과 중국이 1970년대 초 관계 개선에 나섰다. 한반도 문제는 양국 사이에 하나의 의제를 형성하였다. 미국은 현상유지를, 중국은 현상변경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강대국은 평화정착이든 남북통합이든 한반도 분단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중 두 강대국은 동아시아의 긴장완화와 미중관계 개선을 위해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고, 자신들이 한반도의 분쟁에 다시 연루되어 또다시 격돌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두 강대국은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한반도 분단 문제를 국제적 분쟁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의 문제로 내재화하는 데 공조하였다. 또한 두 강대국은 한반도 분단 문제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개입을 축소하고 분단유지의 책임을 남북한으로 전가하였지만, 자신들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자체는 계속 유지하려 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 391-392쪽)

 

당시의 데탕트는 상대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종래의 극단적 대결을 약간 누그러트리는 것이지, 대결을 없앤 것이 아니었다. 중-미간의 대결 양상은 수교 후에도 상당부분 계속되었고 한반도는 대결의 무대로 남았다. 다만 강대국의 직접 대결을 삼가게 되었을 뿐이다. 분단의 내재화란 두 강대국의 이런 필요에 부응하는 변화였다. 근년 대기업이 부담이 큰 성격의 업무를 하청회사에 맡기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은 남한을 냉전대결을 위한 직할부서에서 하청회사로 위상을 바꿔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분단의 내재화를 통해 남북한은 대결의 주체로서 입장을 키우게 되었다. 분단의 비용과 책임을 더 많이 떠맡게 된 것이다. 남한의 경우,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코리아게이트’까지 저질러야 했고, 긴장 완화를 바라는 민심을 억누르기 위해 독재를 강화해야 했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북한 역시 비슷한 위기의식에 몰렸다.

 

남북의 체제경쟁은 결국 남북의 집권세력이 각자의 정치체제를 더욱 억압적인 방향으로 개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 모두 미중관계 개선, 데땅뜨로 조성된 유동적인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남쪽에서는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북쪽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고 후계체제가 확립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일면 데땅뜨 상황에 부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을 격화시키고, 데땅뜨를 위기국면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같은 책 393쪽)

 

베트남전 종전 직후인 1975년 6월 주한 미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는 본국으로 보낸 비밀보고서에서 남한을 미국의 속국으로 보는 ‘구시대적 발상’을 언급했다.

 

“미국의 현 한반도 정책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은 남한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토대로 삼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장차 중견 국가로 성장할 남한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남한 정부는 미국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미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이와 같이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박 대통령은 언젠가 다가올 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 내에서 탄압 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북한은 언젠가 미군이 철수할 날을 고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미국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남한의 장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품고 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110-111쪽에서 재인용)

 

미국의 베트남 포기 정책이 분명해지면서 불안해진 한국 정부를 달래기 위해 미국은 군사적 지원을 과시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74에 작성된 ‘작전계획(작계) 5027’이었다.

 

(한-미 제1군단 사령관) 홀링스워스 중장은 부임 일년 만에 주한미군의 기본적인 작전개념을 바꾸어 버렸다. 북한과의 전쟁을 대비해 미국은 ‘작전계획 5027’을 세워놓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의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그것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한-미 연합군은 이를 격퇴하고 휴전선을 다시 복구한다는 제한적 목표를 지닌 방어전략이었다. 그러나 1974년 홀링스워스는 공세적인 ‘전진방어전략’을 도립했다. 그는 대규모 야포부대를 비무장지대 남쪽 최전방까지 북상시킴으로써 언제든지 북한 영토를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미군 제2사단 소속의 2개 여단은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개성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전진방어전략’은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고 9일 이내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24시간 동안 막강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B-52 폭격기의 지원을 비롯해 한-미 양국군의 엄청난 화력동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시 미 중앙정보부 한국 책임자였던 그레그의 회고에 따르면, 홀링스워스는 한-미 양군이 ‘전진방어전략’을 수행할 정도로 충분한 화력을 보유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공격적인 전략은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발휘해 당시 불안에 떨던 한국인을 안심시키는 성과는 분명 있었다. (김일영-조성렬 <주한미군 역사-쟁점-전망>(한울아카데미 펴냄)91-92쪽)

 

뒷받침할 화력의 확보 없이 공격적 전략을 내놓은 것은 심리적 효과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이 무렵 시작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실효성 없는 이 전략에 실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스나이더의 말대로 ‘임기응변식’ 대응이다. 작계 5027은 꼭 필요한 것인지, 또는 바람직한 것인지 따지기보다 남한 정부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한반도 분단체제는 한 차례 틀을 바꿨고, 그 틀이 1990년경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 396-403쪽에서 이 시기 분단체제의 특성으로 ‘변덕(volatility)’,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 ‘권력의 무책임성과 식민성’ 세 가지를 설명했다.

 

‘변덕’은 ‘휴전’이라는, 전쟁과 평화 사이의 애매한 상황에서 기인한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복잡한 관계망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폭발하기도 어렵고,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어렵다.” 한국전쟁 후 계속해서 존재한 특성이지만, 특히 1970년대 이후 강대국의 의지가 애매해지면서 유동성이 더욱 늘어났다.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도 분단의 시초부터 나타나 있던 특성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대로, 강대국 정책추진의 수단으로 약소국이 이용되어 갈등을 집약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이 특성 역시 1970년대 이후 강대국 간의 관계가 복잡해지는 데 따라 약소국의 부담이 더 많아졌다.

 

‘권력의 무책임성과 식민성’은 남북관계의 한계를 빚어낸 특성이다. 대화를 하더라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 없이 이쪽 동맹국과의 관계, 때로는 상대편 동맹국과의 관계에 이용만 할 생각만 하기 때문에 “서로 곁눈질을 하는 대화, 쳐다보지 않는 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설명을 일부 옮겨놓는다.

 

한반도 분단체제가 장기지속하는 기본 원인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 때문이다. 분단체제는 이러한 권력의 무책임함을 계속해서 발생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란 사실상 ‘식민성’(coloniality)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식민성은 과거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여기에 한정되지 않고, 이와 유사한 권력관계 및 사회관계를 넓게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권력의 기본 특징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총독은 한반도를 통치하였으나 한반도 주민들은 물론이고, 일본 내각이나 의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오직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다. 2차 대전 이후 제국, 식민지 질서는 붕괴되었지만 세계체제의 불균등성은 지속되었다. 이와같은 세계체제의 불균등성은 항상 권한과 책임이 불일치하는 상황을 창출한다.

 

1990년을 전후한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1970년대 초의 데탕트보다도 훨씬 더 큰 정세 변화였다. 한반도 분단체제에도 획기적인 틀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나아가 분단체제 자체의 해체를 몰고 올 수도 있는 큰 변화였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이 분단체제의 변화 방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모색한 것인지를 놓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분단체제의 틀을 크게 바꿀 계기를 만들려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종래 분단체제의 틀을 더 굳히는 퇴행적인 것이었다.

 

홍석률이 제시한 분단체제의 세 가지 특성에 비추어 그 퇴행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변덕’. 외부 여건에 변화가 없을 때도 여론의 피상적 변화에 따라 정책이 극과 극을 오갔다. 둘째,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 이제 ‘강대국 간’의 갈등은 보이지 않고, ‘강대국 내’의 갈등이 문제다. 미국에서 대북 강경노선과 온건노선이 일으키는 작은 갈등이 한국에서는 극한적 대립으로 나타났다. ‘조문 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이 ‘무책임성-식민성’의 문제였다.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다. 조금 떠밀기만 하면 더 빨리 붕괴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그토록 철석같이 가질 수 있었나? 그 믿음이 맞고 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어떤 근거 위에 세우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충분한 숙고를 했는가 여부다. 김영삼 정권에게는 그런 책임감이 없었다. 모든 것을 미국이 책임져 주리라 믿고 저지른 짓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삿대질을 하고 호통을 친 것이 자주성의 표현이라고 김영삼은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른에게 앙탈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책임성이었다.

 

이런 무책임을 ‘식민성’이라 하는 것은 주권도 책임도 없는 식민지인이 종주국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해방 50년 시점에서 이런 식민성이 나타난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원나라의 예속에서 풀릴 때의 고려가 생각난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할 때는 원 제국의 붕괴 조짐이 뚜렷할 때였다. 공민왕의 내외 정책은 원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개혁정책이 중단되고 이인임과 최영이 주도하는 친원 수구정책으로 돌아갔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개혁정책이 재개되어 1392년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1374년이면 원나라가 대도(大都)를 잃고 장성(長城) 밖으로 쫓겨난(1368) 뒤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친원 수구정책이라니? 원나라에 대한 예속을 내재화한 친원파의 존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백년에 걸친 예속기간 중 고려에는 예속 상태에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을 좌절시킬 만큼 강했다. 그러나 더 이상 외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고, 14년 만에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1945년에 명목상의 해방을 맞았지만 친일파를 바탕으로 형성된 남한의 집권세력은 50년간 외세에 대한 종속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책임과 주권이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동안 ‘식민성’이 척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냉전 해소는 종속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국제정세를 만들어주었음에도 식민성을 내재화한 집권세력이 종속 상태의 연장을 바란 것은 고려 말의 수구세력과 마찬가지였다.

 

김영삼의 ‘잃어버린 5년’간 남한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했고, 남북관계에는 발전이 없었다. IMF 충격 속에 김영삼이 퇴진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가는 남한의 움직임이 시작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