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는 서세동점 현상의 여파가 조선에 닥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유럽에서 본격적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자본주의시장을 전 세계로 확장해 가는 움직임이 서세동점 현상의 본질이었다. ‘부국강병’을 이룬 유럽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전통체제에 머물러 있던 어떤 세력도 맞설 수 없었다. 근대 이전에 세계최강의 제국이던 중국이 19세기 중엽 유럽의 힘에 유린당하면서 동아시아지역이 서세동점에 노출되었다.

 

동아시아 천하체제 속에 오랫동안 안주하고 있던 조선도 변화를 강요당하게 된 것이 개항기였다. ‘개항’이란 곧 자본주의시장으로의 편입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구된 변화 방향이 ‘개화’란 이름으로 인식되었고,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한 일본은 같은 방향을 ‘문명화’라고 불렀다. 당시의 유럽인은 자기네의 기독교문명 내지 근대산업문명을 유일한 문명이라 주장하며 정복사업을 ‘문명화’란 이름으로 포장했는데 일본은 이것을 흉내 낸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문명화’가 ‘근대화’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억압통치의 본질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단계에서 시혜적 입장인 문명화보다 조선의 주체적 과제로 근대화를 인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조선의 ‘민족자본’ 세력이 이에 호응해 일본제국 내에서의 발전을 주장하는 ‘개량주의’로 나타났다. 해방 후에도 근대화는 해방 전의 의미를 그대로 가진 채 독재세력의 구호가 되었다.

 

개화-문명화-근대화는 내면화된 서세동점 현상으로서, 무엇을 건설하느냐에 앞서 전통을 파괴하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았다. 처음에는 정복자가 피정복 사회의 저항력을 줄이기 위해 추진한 것인데, 피정복 사회의 매판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복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자기 사회의 통제력을 확보한 매판세력이 제국체제 또는 자본주의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하는 것인데, 편입하는 체제에서 수탈당하는 위치를 향하는 것이다.

 

안병직,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은 20세기 초 일본의 문명화론을 복원해서 식민지배와 독재정치의 범죄성을 ‘근대화’의 포장에 감추려 한다. 이런 시대착오적 주장을 환영하는 상당 범위의 세력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매판세력의 역할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매판세력이 의지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현상이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념 아닌 현상으로 본다. 19세기 말의 제국주의를 이념 아닌 현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자본주의 극한경쟁이 한계를 보였을 때 모순을 완화하거나 해소하기보다 극한으로 몰고 간 반동노선이 제국주의였다. 1970년대 자본주의체제가 또 한 차례 모순을 드러냈을 때 나타난 반동노선이 신자유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개항기 이후의 우리 민족사는 서세동점 현상에 짓눌려 왔다. 좋은 뜻을 가진 선현들이 있었지만 외세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식민통치도 겪고 분단과 내전도 겪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민족사회의 득실보다 외세의 의지를 받드는 세력이 외세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냉전 종식이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멸이라는 사실이 2008년 금융공황을 계기로 분명해졌다. 자본주의 진영이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공산주의 진영을 압박하게 된 것이 애초에 자신의 모순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안정돼 있던 ‘적대적 공존’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공산권 붕괴에 따라 그 자원의 편입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얼마동안 더 연명할 수 있었지만 모순의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추가된 자원이 소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008년은 그 한계가 드러난 시점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굴기가 그 시점에서 두드러진 것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 도달과 짝을 이루는 현상이다. 물론 중국 정책에 자본주의 성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성향도 작지 않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 영국과 미국이 누려온 패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여러 모로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고 있는 중국 리더십의 성격을 예단하기 어려운 점들도 있지만, 서세동점 현상의 극복이라는 지향성은 검토의 가치가 있다.

 

민족문제에 대해 지금 남한 사회에서는 대결주의와 포용주의가 맞서 있다. 그런데 대결주의가 냉전시대의 매판세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외세의 압력이 줄어드는 향후 상황에서는 포용주의로 기울어갈 것이 예상된다.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에 따라 민족사의 회복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