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안 호가 1912년 4월 5일 런던을 떠나 보스턴으로 항해하던 중 4월 14일 항로에 빙산이 너무 많이 떠 있어서 진행이 어려워지자 스탠리 로드 선장은 배를 멈추고 밤을 지낸 다음 날이 밝은 뒤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안 호는 약간의 승객도 실을 수 있는 배였지만 그 운항에는 승객을 태우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 북대서양 항로에는 비정상적으로 얼음과 빙산이 많았다. 로드 선장은 무전사 시릴 에반스에게 인근의 배에게 항로 상황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밤 10시 20분경 타이타닉 호와 교신이 되었다. 에반스가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타이타닉의 무전사 잭 필립스가 말을 잘랐다. “꺼주세요, 꺼주세요! 지금 바빠요. 케이프 레이스와 교신 중이에요!”

 

두 배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소리를 조절할 수 없던 당시 장비로는 에반스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타이타닉의 무전기가 고장 났다가 얼마 전에 고쳐졌기 때문에 뉴펀들랜드의 케이프 레이스 기지를 통해 전송할 승객들의 전보가 많이 밀려 있었다고 한다. 타이타닉 무전실에서는 그 날 다른 배가 전해준 몇 건 빙산 경보도 승무원들에게 전하지 않은 채 깔아뭉개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고 후 조사에서 드러났다.

 

에반스는 잠시 기다리다가 더 이상 타이타닉의 응답이 없자 교신을 끊었다. 10시 30분이었다. 그리고 70분 후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했다.

 

양쪽 배 승무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배는 불빛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빙산과 충돌 후 타이타닉 호에서 무전을 발신했지만 캘리포니안 호 무전기는 꺼져 있었다. 모르스 램프를 써서 캘리포니안 호 방향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관측되지 못했다. 사실은 캘리포니안 호 선원들도 타이타닉 호의 불빛이 이상해 보여서 모르스 램프를 써봤지만 그것도 관측되지 못했다.

 

자정이 지난 후 타이타닉 호에서는 몇 차례 신호로켓을 쏘아 올렸다. 이것을 본 캘리포니안 호 승무원들이 로드 선장을 두 차례 깨워 보고했는데, 선장은 로켓의 수와 색깔을 묻고는 조난신호가 아니라 판단하고 묵살했다. 5시 반에 에반스 무전사를 깨워 무전기를 켜고야(이 사건 이후 항해중인 배에서는 무전기를 24시간 켜놓고 있도록 관계법령이 개정되었다.) 사정을 알게 되었고, 8시 반경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가 할 수 있는 구조작업을 모두 끝내고 있을 때였다.

 

캘리포니안 호는 타이타닉 호로부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배였고, 영국 사고조사위원회는 캘리포니안 호가 신호로켓을 보았을 때 무전기를 켜기만 했다면 “희생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수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로드 선장은 타이타닉 호의 구조신호를 외면했다는 비난과 함께 참극을 키운 원흉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배와 함께 희생된 타이타닉 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의 대비 때문에 로드 선장에 대한 비난이 더 강했다. 그러나 사실 스미스 선장의 책임이 비교도 안 되게 더 컸다. 62세의 스미스는 해운업계에서 명성 높은 고참 선장으로 타이타닉 호 처녀항해의 지휘봉을 맡았다. 그런데 그 날 배에서 보기에도 빙산이 많기 때문에 항로를 조금 남쪽으로 돌리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도 없는 한밤중에 최고속력(24노트)에 가까운 22노트로 질주하게 한 것이 사고의 근본 원인이었다.

 

상업적으로 팽창 중이던 북대서양 항로에서 해운회사들은 속도를 가장 중시했다. 정해진 기일에 맞추지 못하는 것이 빙산에 부딪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으로 여겨졌다. 조선술의 발달과 선박의 대형화가 안전불감증을 부추겼다. 1907년 독일 여객선 크론프린츠 빌헬름 호가(총톤수 2만5000톤으로 타이타닉 호의 약 절반이었다.) 빙산에 부딪쳐 선수가 크게 우그러지고도 항해를 무사히 마친 일이 있어서 해운업계의 자만심을 더욱 키워주기도 했다.

 

충돌 직후 승선 중이던 배 설계자를 깨워 상황을 점검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두어 시간 내에 침몰할 것이라는 판단이 나오자 스미스 선장이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진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추정한다. 명령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해서 혼란을 더했다. 예컨대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라는 명령을 어떤 승무원은 “여자와 어린이만” 태우라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68명 정원의 보트에 20여 명씩만 태우고(주변의 남자 어른들이 타는 것을 가로막고) 바다로 내리기도 했다. 승무원들의 증언을 볼 때 충돌 25분 후 하선 준비 명령을 내린 뒤로는 스미스가 선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침몰이 예측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침몰 순간까지 모르고 있던 승무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선장이 비난의 표적은커녕 찬양의 대상이 된 것은 자기 목숨을 버렸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해상제국으로서 영국인의 자존심도 스미스의 영웅화에 한 몫 했다. 위기상황에서 그가 선원들에게 했다는 한 마디 말이 그의 동상 밑에 새겨졌다. “영국인답게, 여러분, 영국인답게!”(Be British, boys, be British!)

 

사고 내용이 소상하게 알려진 것은 구조된 사람들을 실은 카르파티아 호가 사흘 후인 4월 18일 저녁 뉴욕에 입항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사고라는 사실이 이미 시시각각 밝혀지고 있었다. 4월 17일 미국 상원 본회의에서 윌리엄 스미스 의원이 조사위원회 구성을 발의했고, 그 결과 통상위원회 밑에 7인 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스미스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조사위원회는 이튿날 입항한 카르파티아 호에 타고 있던 주요 증인들을 확보하는 데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4월 19일 아침 심문을 받은 첫 증인은 배에 타고 있다가 구조된 화이트스타 해운(타이타닉 호의 소속사)의 이즈메이 회장이었다.

 

이즈메이 회장에게 비난 여론이 쏟아졌지만 도덕적 비난일 뿐이었다. 이즈메이의 잘못은 살아남았다는 것뿐이었고, 정작 비난을 받을 스미스 선장은 목숨을 잃음으로써 표적이 되는 것을 면했다. 여론이 비난의 표적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캘리포니안 호의 로드 선장이었다.

 

4월 19일 캘리포니안 호가 보스턴에 입항할 때 아무도 그 배와 타이타닉 사고와의 관련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타이타닉 승무원 중에 배 한 척이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그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보스턴 지역신문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로드 선장은 두 배 사이의 거리가 30마일이라고 처음에는 주장하다가 며칠 후에는 20마일로 고쳐 말했다. 그런데 4월 22일 두 개 신문에서 ‘특종’이 나왔다. 불빛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고, 타이타닉 호의 신호로켓도 보았다는 캘리포니안 호 승무원들의 진술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 진술을 들이대며 거리를 다시 묻는 기자들에게 로드 선장은 ‘국가기밀’이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신호로켓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던 앞서의 주장을 뒤집어, 로켓을 보기는 했지만 다른 ‘제3의 배’에서 쏜 것이고 조난신호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제3의 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이타닉 호와 카르파티아 호 승선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지면서 로드 선장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해상에서 구난 요청을 회피한 데다 거짓말까지 하다니! 캘리포니안 호의 그 날짜 항해일지 초본(항해일지로 옮겨 적기 전에 수시로 그때그때 적어 놓는 기록)이 사라진 사실이 밝혀지자 증거인멸 혐의까지 겹쳐져 로드 선장은 참극과 관련된 최고의 악한이 되었다.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로드 선장은 사법처리 대상이 되지 않고 ‘증인’ 역할에 그쳤다. 그의 ‘실수’는 충분히 밝혀졌지만, ‘죄상’을 엄밀하게 증명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법처리는 면했으나 그 대신 무죄를 주장할 길도 없었고, 당시 35세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50년간 치욕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1955년 타이타닉 참극을 다룬 책 <A Night to Remember>(월터 로드 지음)가 나오고 뒤이어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될 때 자기 명예를 되찾아달라고 리버풀선원협회에 호소했다. 그의 처지를 동정한 선원협회는 재조사 청원서를 무역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거듭 기각되었다. 1985년 타이타닉 호 선체 발견 후에도 로드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4월 18일부터 5월 25일까지 활동한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도, 5월 2일부터 7월 3일까지 활동한 영국 무역위원회 조사위원회도, 기소권을 갖지 않은 조사기구였지만 사법처리 권고 결정을 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미국 위원회는 정치인으로 구성되고 영국 위원회는 법관을 비롯한 전문 관료를 주축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여론은 영국 위원회가 폐쇄적이며 ‘제 식구 감싸기’에 치우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미국 위원회마저 영국인 로드 선장의 사법처리 권고를 결정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한편 영국 여론은 미국 위원회의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에 비판적이었다. 철도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 온 스미스 위원장이 다른 위원들보다는 전문성에 접근한 인물이었지만, 해운 방면에는 경험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증인 자격으로 활동에 참여했는데, 조사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가장 신랄한 비평을 모은 대목은 스미스가 한 선원을 심문하다가 “빙산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증인은 아시오?” 물은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그린 풍자만화가 수많은 영국 신문의 지면을 덮었고, 스미스에게는 ‘방수벽(Watertight) 스미스’란 별명이 붙었다. 미국 위원회의 전문성 부족을 꼬집는 논평이 여러 영국 신문에 나왔다.

 

“[스미스는] 영국 선원들의 눈에 우스운 꼴을 보였다. 영국 선원들은 배에 관해 아는 것이 있고, 스미스 상원의원은 아는 것이 없다.” (<데일리 미러>)

 

“결국 일반인의 능력으로는 해상운송과 관계된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데일리 텔리그라프>)

 

“기술적 지식을 가지지 못했고, 그 진행에서는 항해나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데일리 메일>)

 

“해상 사건의 조사에서 시골 법정 수준의 전문성을 보여줬다.” (<이브닝 스탠다드>)

 

영국 정부도 미국 조사위원회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했다. 구명정의 수량을 너무 적게 규정하는 등 영국의 해운 관계법령의 문제점에 대한 미국 위원회의 지적을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 외상은 ‘한심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제임스 브라이스 주미대사는 태프트 대통령을 방문해 상원 조사위원회를 해산하고 그 결정사항을 무시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 조사위원회가 기술적으로 더 충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 위원회에 비해 문제를 이해할 능력이 더 뛰어난 위원들로 구성된 데다가, 기본 사실이 밝혀진 뒤에 활동을 시작했고 조사기간도 더 길었다. 하지만 영국인 중에도 영국 조사위원회에 불만을 품고 미국 위원회의 개방성을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G K 체스터튼(1874-1936)은 말했다. “스미스 상원의원이 사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애쓴다는 점이다.” <리뷰 오브 리뷰스>지 사설에도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는 이즈메이 회장의 유식보다 스미스 의원의 무식을 지지한다. 전문가들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말했다. 그런 지식보다는 무지를 원한다.”

 

어느 위원회도 범죄행위를 밝혀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실의 지적에서 미국 위원회가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 무역위원회가 승선 정원의 3분의 1도 못 싣는 수준의 구명보트 비치규정을 유지해 온 잘못, 선원과 승객의 대피훈련을 소홀히 한 해운회사, 그리고 스미스 선장의 무리한 운항 등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 미국 위원회의 보고서에 들어있었다.

 

반면 영국 위원회의 보고서는 이 모든 잘못을 관행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스미스 선장의 위험지역에서의 과속운항도 “다른 어떤 유능한 선장도 같은 상황에서 그대로 했을 것”이라며 그런 관행으로도 지난 10년간 영국 기선들이 350만 명의 승객을 수송하는 동안 10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지금까지는 ‘실수’로 통하던 것이 앞으로는 ‘과실’로 인정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의 영국 언론은 대개 영국 위원회의 활동과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데일리 텔리그라프>)든가, “보고서가 모든 사람의 책임을 실제로 배제해 준 것이므로 향후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가 어디에서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데일리 메일>)는 말이 사설로 나왔다.

 

그러나 비판적인 의견도 많았다. 타이타닉 호의 2등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사고의 기본조건을 만들어준 무역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운영한 데는 이해관계의 상충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그 조사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세탁’ 활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사건의 연구자 도널드 린치는 이렇게 말했다.

 

“무역위원회에게는 자신의 과실을 덮어버릴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화이트스타 해운회사의 과실을 밝힐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해운회사의 평판이나 대차대조표에 손상이 일어날 경우 영국 해운업이 손실을 입게 되는데, 양쪽에 다 손상의 위험이 있었다. 해운회사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 손해배상 소송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와 화이트스타 회사를 침몰시켰을 것이고, 영국은 수익성 높은 해운시장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와 독일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Titanic: An Illustrated History> p 182)

 

더 최근의 연구자 스테파니 바르체프스키 역시 <Titanic: A Night Remembered>에서 영국 보고서의 기술적 우월성을 인정하지만 “정당한 분노”와 “피해를 보상해주려는 열정”을 담은 미국 보고서에서 더 큰 의미를 찾는다고 말했다. 영국 위원회가 체제와 관행의 주체인 ‘인사이더’를 대표했을 뿐인 반면, 미국 위원회는 수동적 입장에 머물러 있던 이용자-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더 근본적 개혁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1912년. ‘국익’을 하늘같이 떠받들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제국주의 시대의 일이었다. 당시의 패권국가 영국은 기술적 차원에서 사건을 처리하여 기존 체제와 관행을 지키려 한 반면 신흥강국 미국에서는 체제와 관행의 전면적 재검토를 위한 노력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두 나라 사이에 걸친 사건이라서 두 나라의 태도가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호 조사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정치세력은 지금의 한국 사정이 백년 전의 영국처럼 탄탄한 것이라고 믿어서 “이대로!”를 외치는 것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