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1942-2011)은 1970년대 초 김일성 ‘1인 체제’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공식적 제2인자의 위치에 나서고 1990년경부터 통치권을 분담하고 있다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2011년 12월 자신의 사망까지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켰다.

 

1인 체제란 1인의 안위에 체제의 안위가 걸려있는 체제다. 김일성 1인 체제는 1950년대 중반부터 40년간이나 계속된 것이기 때문에 그 상관관계가 더욱 강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체제 계승 준비를 20년간 해왔다 해도 항일투쟁의 후광 위에 반세기 동안 구축되어 온 김일성의 지도력을 후계자가 대신할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북한붕괴론자들은 김일성 사망이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방면의 위기 속에서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이 위기를 얼마동안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지 후계자 김정일의 능력에 많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권력승계 후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관심에 비해 정보가 적은 그의 신상을 둘러싸고 부정적 소문이 횡행했다.

 

김일성이 1994년 죽은 뒤 6년 동안 김정일은 신비로운 은둔자로 남아있었다. 서방 언론들은 남한이나 미국 정보 당국이 유포한 잘못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그를 괴짜이고 난봉꾼이며, 멍청하고 위험하고 비이성적인데다 예측 불가능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다 그는 2000년 6월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감자기 모습을 드러내 세계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셀리그 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115쪽)

 

2000년 이전 김정일의 부정적 모습에 관한 정보의 중요한 출처로 1978-1986년간 북한에서 살았던 최은희-신상옥과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의 기록을 해리슨은 소개한다. 1980년대 북한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시대정신 펴냄)를 참고할 때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 서술을 많이 보았다. 폄하와 비난의 동기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김정일에 관한 황장엽의 서술에는 참고 가치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독자의 판단을 위해 해리슨이 인용한 부분만은 옮겨놓겠다.

 

“김정일은 똑똑하지만 거만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음모꾼이고, 완고합니다. 교활하고 속임수를 잘 쓰지요.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개인적 이익과 손해의 차원에서 모든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김일성) 역시 독재자였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었고 유연했습니다. 나는 대체로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을 너무나 챙긴 나머지 족벌주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비교적 젊은 아들한테 매일의 국무를 처리할 절대 권력을 주는 바람에 자기 아들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는 점입니다. 이제 김정일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책 124쪽)

 

최은희-신상옥의 서술은 직접 찾아보지 않고 해리슨이 인용한 내용만 훑어봤는데, 역시 김정일을 폄하하려는 동기가 꽤 느껴진다. 예컨대 김정일의 별장들에 대해 “사치스럽고 비싼 것들로 치장되어 있지만 어쨌든 좀 촌스러웠어요. 예를 들면 모든 방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있는데 꼴사납고 어색하게 매달려 있었지요.” 같은 대목. 한 국가지도자를 놓고 실내장식 감각을 흉보는 것은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는 것 같다.

 

편향성이 느껴지는 황장엽과 최은희-신상옥과 달리 공정한 입장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남긴 김정일의 측근 한 사람이 있다. 1966년생의 리남옥은 1979년부터 이모인 성혜림(김정일의 아내)을 따라 김정일의 집에서 살며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놀이동무로 지내다가 1992년 제네바 유학 중 망명했다.

 

리남옥은 망명의 동기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서의 나의 정체성과, 여성의 지적-전문적 자아실현에 관한 서구적 개념들을 결합하기 위해서, 나는 조국을 떠났다.” 중매결혼을 피하는 것이 망명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하며, 망명을 도와준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의 아들과 후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망명 초기에 언론 노출을 피한 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위험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들이 왜곡되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인 목적이나 선전에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다가 북한의 기근사태 때 북한에 대한 서방세계의 이해를 늘려줄 필요를 느끼면서 발언을 시작하고 자서전 집필에 착수했다. 그가 결국 자서전 출간을 포기한 뒤 집필을 도와주던 작가 이모진 오닐이 그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Breaking Silence>를 냈다는데, 아마존에서는 이 책을 검색할 수 없었다. (같은 책 118쪽)

 

1998년 미국의 NPR 라디오방송에서 레이 수아레스와 인터뷰할 때 김정일에 대한 리남옥의 발언이 <코리안 엔드게임> 118-119쪽에 인용되어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알려지게 될 김정일의 모습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바깥세상이 만들어낸 김정일의 이미지는] 우스꽝스럽게 희화화된 것입니다. 그는 자유분방하며 현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재기가 번뜩이고, 내가 읽었던 글에서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매우 열심히 일합니다. 그 방은 몇 개의 텔레비전 모니터와 외국의 뉴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특수 라디오들이 있습니다. 그는 개방적이고 컴퓨터나 음악, 자동차, 좋은 음식 등과 같은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유쾌해요. 그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대형 초상화를 내거는 일이나 북한 언론의 우상화를 지적하며 수아레스가 이의를 제기하자 리남옥은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그건 그 사람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그런 일들이 굴러가는 체제 때문이지요.”

 

리남옥의 증언이 강한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극단적 미화를 삼가기 때문이다. NPR 방송 때 시청자 전화에서 김정일의 알코올 중독, 자동차 속도광 등에 대한 질문이 있자 지체 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맞아요, 그는 자동차를 좋아하죠. 그건 사실이에요. 술도 엄청 잘 마십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들은 누구나 술을 많이 마셔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점에선 별로 독특하지 않습니다.” (같은 책 119쪽)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 인터뷰(1998년 2월 10일자)에서도 키에 대한 김정일의 자의식을 가볍게 인정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키 크기 위해 운동하라고 거듭거듭 얘기했어요. 그는 아들 김정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 120쪽)

 

해리슨은 1972년과 1994년에 김일성을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과는 2001년 <코리안 엔드게임> 집필 때까지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김정일은 국민에게 (김일성처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라는 인상을 받았으며, 권위 있는 지배 대신 실제적 해결을 요구하는 북한 현실의 변화를 이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125쪽) 2001년 시점에서 해리슨은 김정일의 역할을 이렇게 내다보았다.

 

김정일은 그의 아버지처럼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아니며, 아버지의 리더십 모델을 모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헌법을 새로 개정해 군부가 노동당 대신 정치적 권위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 이를 자신의 권력 토대로 만들었다. 북한은 이미 무혈 군사 쿠데타를 겪은 셈이다. 김정일 체제는 이런 과정을 거쳐 분파주의가 준동하는 일 없이 또 다른 후계 체제로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 지도자들이 김정일에게 한 것처럼 새로운 지도층에 대해서도 권력 토대와 정치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조심스럽게 ‘비밀스런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카리스마나 획일적인 통제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1년의 평양은 김정일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압력단체들의 경쟁과 매파와 비둘기파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정글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중하게 계획한 개혁안은 통치 기간 동안 탄력을 받을 것이며, 이는 북한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실용주의적 경제정책으로 변화하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계자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같은 책 114-115쪽)

 

해리슨이 북한 옹호에 너무 기울어졌다는 이유로 미국 관리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코리안 엔드게임>을 읽은 내 판단으로는 편향성이 그리 심하지 않다. 2000년 이전, 북한에 관한 정보가 극히 적을 때 근거 없이 북한을 폄훼하는 대결주의자들이 언론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병신 취급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에 관해서도 해리슨의 관점이 정확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0년 6월 3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특사로 북한에 가 김정일을 처음 만난 임동원은 귀경 후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수긍이 되면 즉각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성격입니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스메이커> 73쪽)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에 대한 외부 인식의 변화를 해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은 그가 “지성과 분별력, 개혁 마인드를 갖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김정일과 여섯 시간 동안 회담을 한 뒤, “상대방의 얘기를 매우 잘 들으며 훌륭한 대화 상대자이다. 매우 결단력이 있으며 실용주의적이라는 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 진지했다.”고 묘사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가 표현한 것처럼 워싱턴의 일상적인 회의석상에서는 그가 “이성적이고 개방적인 일련의 정책을 지원할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서울 언론들도 남북 정상회담이나 그 뒤 8월에 김정일이 46명의 남한 언론사 사장을 위해 주최한 오찬을 보도하면서 비슷한 시각을 나타냈다. 남한 언론들은 그의 “실용주의적 태도”, “깍듯한, 전형적인 한국식 예의범절”, “자신 있고, 자유롭고, 여유 있고, 솔직한” 성격,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 “세계 사정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 등에 대해 보도했다. CNN이나 BBC, 일본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이런 지식을 얻은 것 같다는 얘기도 보도되었다. 남한에 주재하는 <파이낸셜타임스> 특파원이 보도한 것처럼, “한때 김정일을 경멸의 표적으로 만든 것들, 예를 들어 배불뚝이에다 왜소한 체격, 부풀린 헤어스타일, 뒤굽을 높인 구두 등은 이제 오히려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남한의 어린이들은 그의 사진을 “만화로 그려 전자우편으로 부치기도 하고, 그가 배불뚝이인데다 마음을 밝게 해준다면서 텔레토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코리안 엔드게임> 115-116쪽)

 

김정일이 “거만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음모꾼”이라는 황장엽의 말은 한 마디로 황당무계할 뿐이다. 그런 말을 그가 한 것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말을 함으로써 그가 혜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2000년 이전에는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2000년 6월 이후로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대결주의자들은 북한붕괴론의 설득력을 늘리기 위해 북한 사정을 나쁜 쪽으로 선전하는 경향이 있었고, 김정일을 정신병자나 인격파탄자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그중 중요한 일이었다. 북한 사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적을 때 그들의 선전활동은 절제 없이 펼쳐졌다. 2000년 김정일은 그런 사정을 이용해 반격의 홍보전에 나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때문에 북한 사정을 거꾸로 미화해서 상상하는 풍조까지 일어났다. 나 자신 2002년 연변에 처음 가볼 때까지 북한 경제난에 관한 보도가 대결주의자들의 선전에 치우친 것이 아닐까 의심을 품고 있었다. 두만강 너머 헐벗은 북한 강산을 바라보며, 연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북한의 참상이 사실이라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니라.” ‘앎’이 무엇인지 자로(子路)가 물을 때 공자의 대답이다. 적게 아는 것보다 잘못 아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정보가 부족할 때는 억지로 짐작하지 말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김정일이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을 때 종래의 잘못된 선전 내용을 벗어던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도 조심할 일이다.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일이 특별한 인격상의 문제가 없고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의 권력 세습이 맹목적 권력승계가 아니라 치밀한 체제 운용방법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권력자의 유고(有故) 여부에 붕괴론이 지나치게 의지했던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