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그 해리슨(1927~ )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한반도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미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이래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변화를 살펴왔다.

 

1994년 6월 카터-김일성의 만남에 관해서는 해리슨의 설명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만남의 바로 며칠 전에 해리슨이 김일성을 만나 비슷한 범위의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의 평양 방문은 클린턴 대통령을 임기 중 아마도 가장 치명적이었을 전쟁 위기로부터 구했다. (...) 그러나 정황을 종합해 보건대 클린턴과 그의 보좌관들은 카터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의 평양 방문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갈루치와 페리는 두드러진 예외였을 뿐이다. 카터 전 대통령이 일시적인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유엔의 제재 정책을 중단시키고 협상이 재개되도록 했음에도, 그들은 이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기는커녕 화를 냈다.

 

지금도 보좌관들의 상당수는 핵의 참화로부터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다. 앤서니 레이크 전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2000년 6월 18일 대화를 나눌 때 유엔의 제재 조치라는 위협이 효과적이었다며 옹호하려고 했다. 그는 왜 북한이 당시 핵동결에 동의했는지에 대한 “빗나간 논쟁”이 있었다고 얘기를 꺼냈다. “카터가 한 일인가 아니면 제재가 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논쟁이었습니다. 둘 다였지요.” 그러나 이 장에서 다루겠지만 그 논쟁은 잘못되지 않았다. “카터가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카터야말로 비생산적인 제재 위협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중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제재 결의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제재 위협이 점점 그 실효성을 잃어 가던 상황이었다. (<코리안 엔드게임> 337-338쪽)

 

해리슨은 당시 정부 고위관료 중 페리 국방장관과 갈루치 국무차관보만이 카터의 역할을 환영했다고 보았다. 카터가 클린턴에게 방북의 뜻을 알렸을 때 클린턴은 갈루치를 보내 브리핑을 해주게 했고, 카터는 김일성을 만난 후 평양에서 전화했을 때 다른 사람 아닌 갈루치를 찾아 용건을 말했다. 갈루치는 클린턴과 카터 사이의 비공식 ‘특사’였던 셈이다. 카터의 전화가 왔을 때 클린턴이 “그는 갈루치와 얘기하길 원할 걸세”라고 말한 것을 갈루치가 기억했다고 하는데,(<코리안 엔드게임> 343쪽) 앞서 인용한 <북핵위기의 전말> 278-281쪽에 그려진 장면과는 차이가 있다.

 

카터의 역할에 대한 반대자의 대표로 레이크 안보보좌관을 예시했다. 반대 이유는 유엔 제재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에 소개한 대화에서는 (타협이 아니라 협박을 해야 한다는) 원래의 주장을 굽혀 타협과 협박이 합쳐져 효과를 일으켰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주장했던 협박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카터가 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반박하는 해리슨의 말에서 레이크를 한심해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1927~ )은 북미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사람이므로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시사상식사전>(박문각 펴냄) 내용을 옮겨놓는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미국 국방장관과 대북정책조정관(North Korea Policy Coordinator)을 지낸 인물.

 

윌리엄 페리는 스탠퍼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통신 및 군기술 분야의 경영진으로 있다가 1977년 카터행정부에서 기술담당 국방차관으로 임명된 군수통권자다. 카터 행정부 때 그는 스텔스비행기 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스텔스 기술의 아버지’로 불렸다.

 

스탠퍼드대 교수와 국제안보 군축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빌 클린턴의 1차 임기 때인 1993년 국방부 부(副)장관으로 기용됐으나, 전임 애스핀 장관이 소말리아 사태 등으로 중도하차하면서 장관이 됐다. 페리는 클린턴 재선과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었으나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금창리 핵의혹시설 문제 등으로 사태가 복잡해지자 클린턴 대통령이 그해 11월 대북정책 전반을 검토할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페리는 1994년 영변 핵시설을 둘러싼 위기 때 북한 폭격론을 입안했다는 이유로 강경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보는 '온건한 합리주의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클린턴 정부시절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1999년 5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후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0월 제출한 ‘페리 보고서’는 이후 미국 대북정책 방향의 지침서가 되었다. 2000년 9월 대북정책조정관직을 사임했으며 이후 스탠퍼드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다.

 

1994년 북핵위기의 진행과정에서 페리는 북한 폭격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전면전의 대책을 강구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대결정책을 선호하는 군부의 입장을 대표하는 ‘강경론자’로 보일 수 있는 역할이다. 그런데 막상 전면전의 전망을 검토하면서 미국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노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합리주의자’의 역할을 한 셈이다. ‘유엔 제재’의 강경노선을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전면전의 위험을 외면한 레이크 보좌관 같은 사람들을 주저앉히는 데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해리슨은 페리의 당시 입장에 대해 2000년 5월의 인터뷰에서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것[카터의 방북]을 활용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정부와는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레이크 안보 보좌관은 둘 다 불안해했습니다. 문제는 그에게 대통령의 특사로서의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코리안 엔드게임> 340쪽)

 

카터가 김일성과의 회담 직후 전화로 갈루치에게 회담 내용을 ‘통보’만 한 후 바로 가진 CNN과의 회견에는 유엔을 통한 제재 방침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는 것이었다.

 

카터의 CNN 인터뷰는 유엔의 제재 전략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담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에 참석 중인 몇몇 인사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백악관이 김일성과 카터의 합의를 즉각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린턴과 고어를 포함한 다른 인사들은 수용할 만한 동결 조건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고어는 물었다. “우리가 이 레몬으로부터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카터는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코리안 엔드게임> 344쪽)

 

핵연료 재처리에 대한 사찰 요구를 무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카터가 제재 전략에 반대한 중요한 이유였다. NPT 규정은 재처리에 대한 제한이 없다. 재처리를 규제하려 드는 것은 미국의 정책일 뿐이었고, 북한이 재처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은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뿐이었는데, 그것은 남북한 사이의 약속이었다. 미국이나 유엔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처리가 NPT에서 금지하는 활동이 아니라면 미국이 어떻게 북한의 재처리를 막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이 말을 들은 갈루치는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7년 4월 카터 행정부 출범 초기에 새 행정부 비확산정책으로서 바로 재처리를 중단하기로 했었던 것이다. (...) 아시아에서는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재처리를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에 따라 일본과 갈등을 빚은 후 포기한 적도 있다. (...)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갈루치는 대답했다. NPT는 재처리를 금지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재처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갈루치는 바로 카터 행정부 시절에 미국이 동맹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들에게 재처리를 반대하는 정책을 취했고, 북한을 포함한 핵확산 잠재국들의 재처리를 중지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카터는 이 점을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카터 방북기간 중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만들게 된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46-247쪽)

 

북한은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으로 있던 해리슨에게 초청의 뜻을 5월 중순 전해 왔고, 6월 4일 평양에 도착한 해리슨은 6월 9일에 김일성과 면담했다. 김일성이 해리슨을 불러 만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리슨은 4월 말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김정수 차석 대사를 두 차례 만나 핵문제를 토론하고 재처리시설 가동 중단을 앞당기는 쪽으로 협상해야 한다는 자기 의견을 평양에 전해달라고 했다. 평양 도착 후에도 김일성 면담 전에 북한 관리들과 핵문제를 토론했다. 평양의 협상파(강석주 등)가 북한에 우호적인 미국 전문가인 해리슨의 의견을 김일성에게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만났을 때 협상을 위해 재처리에 관한 북한 측의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하자 김일성이 보인 반응을 해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놀랐을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강석주를 돌아보며 7분 동안 얘기를 했고 통역은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마침내 김일성은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매우 흥미 있군요. 만약 그것이 당신들의 우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경수로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확고히 보장하는 데 합의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그렇게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 나라가 당신들의 결정을 지킬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소? 당신네들이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나의 동지들은 외교관들이 이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에게 확신을 줬소.” (<코리아 엔드게임> 351-352쪽)

 

카터의 방문은 미국의 태도에 대해 북한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해리슨은 귀국 후 <워싱턴포스트>(6월 13일)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북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6월 15일에는 국무부의 허바드를 찾아갔다. 한반도 담당 관리들에게 평양 사정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위트-폰먼-갈루치는 이렇게 소감을 적었다.

 

해리슨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짜증나는 이야기였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첫째, 김일성은 미국과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했다. 아마 그런 척 하거나 아니면 잘못 알고 있을 것이었다. 둘째, 김일성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새로운 경수로의 맞교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거래에 대한 약속만 해도 북한 프로그램의 일부, 특히 재처리시설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었다. 해리슨이 미국에 돌아온 후 북한인들은 그에게 IAEA사찰단이 “제대로 행동한다면” 영변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북핵위기의 전말> 261쪽)

 

해리슨의 이야기가 국무부 관리들의 마음을 바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카터가 전해줄 소식을 받아들이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실무진의 마음의 준비는 시켜줬을 것이다.

 

결국 해리슨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북한이 외교적 해결에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협상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연료봉 교체까지 감행한 상태에서 북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급격히 돌아가는 상황에서 해리슨이 접촉한 사람은 백악관 상황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해리슨의 이야기가 백악관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해리슨이라는 인물 자체도 문제였다. 그는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래 견지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졌던 것이다. 수개월 후 위기가 수그러들고 외교적 접촉이 재개되어 합의에 이른 다음에야 북한이 그 때 상당히 진지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62쪽)

 

카터의 귀국 전인 6월 20일 레이크 안보보좌관이 몇 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해 관리들과 함께 토론을 벌인 자리를 해리슨은 이렇게 그렸다.

 

회의의 분위기는 카터 방북의 결과에 대한 환호보다는 미국이 속아넘어갔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갈루치는 나에게 핵동결에 대해 김일성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상세하게 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의 답변이 카터와의 통화 내용과 일치한 데 대해 만족해하는 듯 보였다. 그 토론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은 북한이 유엔의 제재를 피해 보기 위해 단지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보았다. 카터가 연 돌파구에 따라 곧바로 협상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내가 끼어들기 전까지 토론은 30분 동안 남한에서 미군을 어떻게 증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도 나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때 클린턴이 회의실로 들어와서, 나와 그레그를 쳐다보고는, 6월 14일 PBS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맥닐-레러 뉴스 아워’에서 우리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신들 견해에 동의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코리안 엔드게임> 344-345쪽)

 

위트-폰먼-갈루치는 해리슨이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래 견지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졌다고 했다. 워싱턴 관료들에게 ‘종북주의자’로 찍혔다는 얘기다. 이 점을 의식한 듯 해리슨은 2002년에 낸 <코리안 엔드게임>의 제1부에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란 제목을 붙여 대북 강경론자들의 ‘북한 붕괴론’을 반박했다.

 

해리슨이 그 책을 낼 때는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도 아직 불안할 때였다. 그 시점에서 해리슨이 어떤 이유로 북한은 소련이나 동구권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는지, 다음 주에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