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5:48

목요일(27), 이천에 12시 도착, 둘이 점심부터 먹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11시나 11시반쯤 도착해서 요양원으로 바로 가면 점심을 먹지 못해 오후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2시 45분 요양원에 도착해 현관에서 벨을 누르고 올라가니 원장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2층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얼굴이 보이자마자 곁에서 묻기도 전에 "아~ 내가 아는 사람들이구먼!" 하시고, 복도 가의 탁자에 앉은 뒤 옆에 앉은 며느리 손을 쥐신다. 곁에서 "이 분 누구신데요?" 하니까, 서슴없이 "내 며느리예요." 이렇게 거침없이 며느리 알아 보시는 건 우리 결혼 후 처음이다.

자나깨나 최대 관심사는 먹는 것인 듯, 다른 얘기 별로 나오기도 전에 "나는 아까 뭘 먹은 거 같은데, 너희는 뭐 먹었냐?" 병원 계실 때 금강경 읽어드리다가 식사가 나오면 "어머니, 금강경도 식후경이죠." 하던 생각이 나서 "네 어머니, 저희 밥 먹고 왔어요. 어머님도 식후경이란 옛말이 있잖아요?" 하니까 "뭣도 식후경? 그게 무슨 뜻이냐?" "어머님도 식후경이요. 아무리 어머님 뵙고 싶어도 식사는 먼저 해야 한단 뜻이죠." 했더니 "예끼, 그런 말이 어딨어?" 하시고는 한 숨 쉬고 표정을 가다듬은 뒤 "이 썅놈아!" 통렬하게 한 마디 내뱉으신다.

지난 주 뵐 때도 이제 쌍욕 안 하기로 약속하셨다고 김 여사가 자랑한 일이 있고, 며칠 전 원장님도 통화하는 길에 어머니 입에서 "썅년" 소리가 거의 없어졌다고 좋아하며 얘기한 일도 있다. 그렇지만 욕을 잊어버리신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니 더더욱 안심이 된다. 욕을 먹을 만한 놈에게 정확하게 쓰시는 걸 보면 요즘 욕을 안 하시는 게 건전한 판단력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욕을 벌으셨네, 벌으셨어!" "할머니, 그런 덴 욕을 하셔야 해요!" 옆에서 웃고 좋아하며 한 마디씩들 하신다.

영천에서 부친 복숭아가 어제 도착해서 한 차례 돌렸다고 한다. 우리도 먹으라고 한 접시 내 오면서 어머니 앞에도 얇게 썬 것을 작은 접시로 놓아드렸다. 이빨 없이도 우물우물 잘 잡수신다. 이 정도면 틀니 없어도 식생활 즐기실 수 있는 폭이 충분하겠다.

식사시간 직후라서 우리만 먹을것 놓고 있는 것이 그리 민망스럽지는 않은데, 영감님 한 분, 온화한 인상에 풍채도 좋으신 분이 서슴없이 다가와 내 옆에 앉더니 복숭아를 집어 드신다. 잠시 후 원장님이 지나치다가 보고 잠깐 멈칫, 망설이다가 우리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싱긋 웃고 지나갔다. 나중에 이사장님 얘기를 들으니 교장으로 계시다가 퇴직한 후 풍을 맞고 판단력을 잃으신 분이라고. 그분 보살피는 데 제일 어려운 문제가 남존여비 관념이라고 한다. 여성 간병인이나 간호사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아 한 분 있는 남성 간병인이 없을 때는 이사장님이나 원장님의 권위라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까지도 팽배해 있는 남성 권위주의가 보이지 않는 중에도 사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사장님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남 같지 않아 그런지, 운영의 어려운 문제들까지 기탄없이 털어놓고 말씀하신다. 역시 사람 쓰는 일이 이런 벽지에선 문제다. 사람이 한 번만 바뀌어도 공백이 크게 될 위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간병인 인력은 가급적 여유있게 늘 확보해 놓는 방침이라 한다. 부인과 원장님 외에 그래도 나이 있는(그리고 정신 멀쩡한) 사람과 얘기 나누는 게 좋으신 모양이다. 아내가 어머니 살펴드리는 동안 이사장님 말씀 많이 들어 드리는 것도 어머니 위해드리는 일로 여기고 열심히 듣는다.

네 시경이 되어 요양원을 떠났다. 지난 주에 비해 우리가 응대해 드리는 걸 요긴해 하시는 눈치다. 금강경 읽어드려도 졸지도 않으시고, 노래도 싫증을 안 내신다. 그런데 이제 떠나야겠다 싶어 "저희 그만 가겠습니다." 했더니 "그래? 그럼 내일 또 올래?" 하시는데 "내일은 못 오고요, 머지 않아 또 올께요." 하니까 "그래, 잘들 가거라. 또 오렴." 선선하시다.

지난 주 뵐 때 황홀한 행복에 빠져 계신 것처럼까지 보이시던 데 비해서는 현실의 양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달 후 큰형이 찾아뵐 때 기쁨을 느끼실 발판은 이쪽이 더 탄탄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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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