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5:44

11시 반쯤 도착했다. 7월 19일 와서 하룻밤 묵어간 후 근 한 달만이다. 그 사이에 원장님이 여러 번 메일과 전화로 잘 지내신다고 확인해 줘서 마음에 불안한 것은 없다. 다만, 2년 동안 매일 보다시피 하던 녀석을 모처럼 오랫만에 보시면서 반응이 어떨지 무척 궁금했다.

우리 부부가 나타나니 직원과 간병인들이 모두 반가워하며, 아내에겐 고향 잘 다녀왔냐는 인사, 내게는 몸이 괜찮냐는 인사를 건넨다. 간호사 서 선생은 "교수님 이번 몸살이 심하셨나봐요. 이천까지 소문이 났어요." 하고 웃는다.

열렬한 환영이 더욱 마음을 놓게 해준다. 영규 형님이 친구인 이사장님도 만날 겸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다녀간 것도 VIP 대접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 사람들이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밝고 따뜻한 것은 어머니가 이분들께 사랑받고 계시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테라스에서 바람 쐬고 계시다기에 나가 보니 저쪽 끝에서 이쪽을 향해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나타나는 것을 보시고는 아주 짧은 순간 놀라움의 표정이 스쳐 지나가고는 빙긋이 웃음을 띠고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쳐다보신다. 옆의 노인분들이 "아드님 오셨네요." 하니까 그게 뭐 별일이냔 듯이 "그런 것 같군요." "몇째 아드님이세요?" 하니까 상투적인 "몰라요. 야! 너 몇째냐?"

"어머니 한 번 맞춰보세요. 잘 맞추시면 상 드릴께요." 했더니 "상도 있냐? 그거 좋구나." 하시고는 잠깐 생각하시는 척하다가. "셋째. 너 셋째 맞지?" 어머니 곁으로 가서 "네 잘 맞추셨습니다. 상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이마에 뽀뽀를 해 드리니까 실눈을 하고 "아~ 상 타니까 좋다~"

옆에서들 이제 아내를 가리키며 "이 분은 누구세요?" 하니까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걸치신 채 아내를 올려보고 내려보시고는 "그거야 누구 꼬랑탱이 따라왔는지 보면 알지. 너 셋째 며느리지?" 아내는 알아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기쁘다. "네, 어머니. 잘 맞추셨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어머니는 "넌 뽀뽀 안해 주냐?" 하셔서 모두들 큰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계시던 노인분들이 모두 어머니의 언행을 재미있어 하는 것을 잠깐 사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가족 간에 회포 푸시라는 뜻인지 하나 둘 자리를 비켜 주셔서 세 식구와 간병인 김 여사가 남아 잠깐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김 여사는 '박사 할머님' 덕분에 자기네 같은 일꾼들도 그곳 생활이 더욱 즐거워졌다고 거듭거듭 확인해 주었다.

"여기 일하는 사람들, 간호사고 간병인이고, 모두 할머니께 '쌍년' 소리 많이 들었죠. 그래도 화내고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요. 미워서 하시는 욕이 아닌 줄 다 아니까. 저한테는 며칠 전부터 쌍욕 안하겠다고 약속도 해주셨어요." 우리에게 이야기하다가 어머니를 돌아보고 묻는다. "할머니, 저한테 욕 안하겠다는 약속 하셨죠?"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약속? 무슨 약속? 난 모르겠는데?"

김 여사가 열심히 확인한다. "할머니, 엊그제 그러셨잖아요? 우리 여사님들이 다 좋은 사람들인데, 좋은 사람들한테 나쁜 욕 하면 안 되겠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석연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말씀하신다. "그래, 내가 '쌍년' 소리 안하겠다고 그랬지."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눈을 부릅뜨시고는 한 마디 내뱉으신다. "썅!" 김 여사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우리도.

웃고 즐기는 사이에 식사시간이 되었다. 한 달 전 생각을 하고 내가 김 여사에게 물었다. 앉아 계신 지 오래 되었느냐고. "네, 아침에 머리 깎아 드렸는데, 그때부터 쭉 앉아 계셨어요." 대답하다가 묻는 뜻을 깨닫고 덧붙인다. "요새는 몇 시간 앉아 계셔도 힘들어하지 않으세요. 앉아서 식사 하실 수 있어요." 곁에서 듣던 어머니, 같잖다는 듯이 끼어드신다. "앉아서 먹지 않으면, 누워서 먹으란 말이냐?" 참 용 되셨다.

지난 달 왔을 때는 방에서 침대에 기대 누우신 자세로 내가 떠먹여 드렸었다. 오늘은 식당에서 드시게 하고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식당에는 노인분들이 다 모여서 함께 식사하시기 때문에 방문자들이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때 외출에서 돌아온 원장님이 우리에게 위 테라스보다 선선한 아래층 바깥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식사가 끝나신 후 모시고 나오겠다고 한다.

아래 테라스에서 아내가 쉬는 동안 정원을 둘러보러 내려갔다가 이사장님과 마주쳐 그늘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영규 형님과 정이 꽤 두터운 사이였던 모양이다. 형님 다녀간 얘기부터 이런저런 지난 얘기들 늘어놓으시는 데서 역력히 느껴진다.

이사장님 식사 시간도 된 것 같아 테라스로 올라와 아내랑 합류하니 두 달 전 생각이 난다. "우리 내외가 여기 처음 와서 이 자리에서 이사장님 만났던 생각이 납니다. 그 사이에 어머니를 이렇게 편안히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이사장님과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사장님도 "나도 생각납니다. 교수님 내외분 처음 볼 때부터 참 인상이 좋았어요. 어머님을 모시게 되어 우리도 기쁩니다." 화답해 주신다.

잠시 후 원장님이 어머니를 모셔온 뒤 이사장님과 식사하러 가시고 세 식구가 얼마동안 앉아 있었다. 뾰족이 할 얘기도 없고 재미나는 일도 없는 자리인데, 이런 자리에서 어머니 마음이 편안해지신 것을 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지루해 하거나 불편해 하는 감각을 잃어버리신 것 같기까지 하다.

허리 아픈 감각은 안 잃어버리셨다. 아마 네 시간째 앉아 계셨을 것이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기에 방에 가서 누우시겠냐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신다. 침대에 눕혀 드리고 있는 동안 같은 방의 세 분이 다 들어와 누우셨다. 모두 휠체어로 다니시는데,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 인상들이 다들 좋으시다. 병 때문에 어둡고 괴로운 인상을 가진 분들도 더러 계시는데, 이 방은 속 편한 분들 모아놓은 것 같다.

아내에게 곁을 지켜드리라 부탁하고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먼저 얘기했다. "이제 마음 푹 놓았습니다. 어머니 모시는 일은 이제 여러분께 맡겼으니 제가 곁에서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센스가 원장님에겐 있다. 센스만이 아니라 실천하는 힘까지 가진 분이니, 정말 믿음이 간다. 요양원장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자식 노릇 대신 해드릴 역량을 가진 분이다.

필요한 얘기를 나눈 뒤 원장님이 자진해서 나서 준다. 마침 시간이 있으니 사모님을 같은 고향 분들에게 인사시켜 드리겠다고. 방에 가니 어머니는 내가 적어드린 <푸른 하늘 은하수>와 <섬아기> 가사를 놓고 며느리, 김 여사와 함께 열창 중이셨다. 그 두 곡은 여사님들도 다 아는 곡이라서 자주 꺼내 함께 불러드리는 모양이다.

원장님이 아내를 끌고 나간 뒤 반야심경을 권하니 낭랑하게 외우시는데, 하나도 거침이 없으시다. 금강경을 꺼내니 "그건 네가 좀 읽어 다고." 하시고도 눈앞에 펼쳐달라 하시고는 내가 읽는 데 따라 입을 오물오물 하신다. 제 7분을 읽는 동안 눈이 감기시고 제 9분에 가서는 코를 골기 시작하신다.

나와 보니 방 바로 앞 탁자에 이사장님이 앉아 계시다. 시간은 한 시 반. 여태 식사를 안해서 어쩌냐고, 간식이라도 좀 드시라고, 옆의 너스 스테이션에 준비를 부탁해 주신다.

다니는 동안 눈길을 끈 정신장애인 남자 한 분이 있었다. 나이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아래가 분명해 보이는데, 정말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이로 보여서 볼 때마다 안됐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이사장님과 앉아 있는 동안 남자 간병인 한 분이 그를 이쪽으로 데려와 휠체어에서 이사장님 등 뒤의 소파에 옮겨앉혀 주었다. 이사장님이 잠깐 몸을 돌려 앉히는 것을 도와주고는 다시 내게 몸을 돌리며 말씀하신다. "내 아들입니다."

전에 들은 적은 있다. 아드님 한 분이 장애인이어서 장애인학교를 만들 생각으로 이 터를 원래 장만하셨던 것인데, 학교 설립은 여의치 않았고, 곡절 끝에 이 요양원을 차리게 되었다고. 그런데 그 아드님을 여기 수용하고 계신 사실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한 마디가 계속 내 머릿속에 울렸다. 그리고 생각이 퍼져나갔다. 장애인인 아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이 분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장기요양보험제도 시행으로 인해 요양원이 유망한 사업분야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 요양원의 엄청난 시설 수준으로는 이득을 바라보기 힘든 사업방식이라는 것이 내 눈에도 분명했다. 이제 납득이 된다. 이사장님은 시설비의 이자 부담이란 간접비용은 생각지 않고 직접비용만 감당할 수 있으면 아들을 위해 이 사업을 지켜나가려는 의지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나눔의 철학' 아닐까? 생활능력 없는 아들을 격리시키고 보호하려 들기보다 이 요양원을 아들과 함께 집으로 여기고 그 안의 생활을 함께 누릴 '식구'들을 모아주는 것. 나부터 어머니를 편안하고 즐겁게 모실 이 장소를 마련하는 데 그의 역할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고마운 뜻을 장애인인 아들이 직접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고마운 마음이 그의 인생에 의미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케익과 과일로 요기를 하고 나서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또 초롱초롱하시다. 그러나 몇 마디 나누고 바로 일어나 떠났다. 우리가 아직 점심식사도 못한 불쌍한 신세임을 원장님이 그 사이에 입력시켜 드린 듯, "너희들 점심은 먹었냐?" 물으시는 데 냉큼 "네, 이제 먹으러 갈께요." 했더니 "그래, 가서 잘들 먹으렴." 선선히 말씀하시고는 "와줘서 고맙다." 덧붙이신다.

오랫만에 왔다가 일어설 때 이렇게 선선히 보내주시는 것은 무엇보다 이곳의 생활이 아쉬움 없이 즐겁고 편안하신 덕분 아니겠는가? "효도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신 어버이를 상대로는 세상에 효자 못할 놈 누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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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