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선생님,

우선 <해방일기> 마치신 것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글이 담담하고 담백하네요.

저는 무언가 커다란 얘기를 기대했는데, 거꾸로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3년의 작업을 저렇게 가볍고도 소탈하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구나.

한 수 또 배웠습니다.

 

21세기 민족.....도 잘 읽었습니다.

이걸로 강연회도 하시는 것이죠?

후지이 다케시가 역문연 연구실장이던데,

작년에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의 '유교적 근대론' 토론회 사회도 맡은 걸로 압니다.

 

글 읽으며 떠오른 단상 몇몇만 풀어둡니다.

북에 대한 견해가 궁금해지네요.

남의 친일파, 친미파 엘리트층이,

전통 문명과 단절되고 자기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공공성이 부족한 집단임은 분명한데,

북쪽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맺는 말로 남겨두신 민족사회 회복과도 통하는 문제일 터인데,

선군정치, '김일성 민족' 등등에 저는 기겁하는 편이라서요.

남쪽보다 더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가근대-본근대 발상은 신선하네요.

확실히 너른 시각의 미덕이 발휘된 지점 같습니다.

미야지마 선생의 유교적 근대,

요나하 준의 '재근세화' 등과 아울러서 요긴한 참조틀로 새겨두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본근대의 밑천을 발굴하고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20세기에도 '전통적 근대화'의 지향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재적 발전론이 '실학'에서 근대의 흔적을 과장되게 주장했다면,

식민지 근대론은 20세기 초의 한글 근대, 일어 근대만 주목한 담론 같아요.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한학적 소양을 갖춘 상태에서 서학도 익힌 이들이 남긴 '한문 근대'가 있지 않았을까.

그게 내발론이나 식민론 양 진영의 서로 다른 이유로 외면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고루한 한학도 하니고, 성급한 서학도 아니고, 옹졸맞은 국학도 아닌,

셋을 조화롭게 회통시킬 수 있는 동학의 유산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남과 북의 통합이 문명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도 그러해야 할 것 같고요.

 

베트남어 공부하며 베트남사 공부를 병행하는데,

프랑스어, 국어(베트남어), 한문이 혼재했던 20세기 초가 흥미롭더군요.

협력자가 된 프랑스어 구사자, 혁명으로 내달린 국어 구사자,

그에 못지 않게 지방에 내려가 서당을 꾸려간 일군의 식자들이 있었습니다.

1919년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국자감이 제 역할을 못하니 하방한 셈이죠.

이들(중 일부)은 좌나 우로 기울지 않으면서 근대 안에서 근대 밖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던 게 아닌가.

1920년대부터 '불월학교'에 입학한 신청년들보다 더 깊이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식민지 조선에도 투사해 보게 됩니다.

   

 

적절한 속박... 얘기는 참 흥미롭네요.

혹 싱가포르에 대한 관심도 있으신지요?

요즘 리콴유 인터뷰와 책들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유교국가가 현대화되면 싱가포르처럼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와 '아시아적 가치' 논쟁하며 민주주의 편을 든 것이 김대중이었는데,

어떤지 시간은 리콴유 편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글로 한 번 정리하고 싶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밖에서 본 중국사>는 아껴만 두겠습니다.

선생님의 공력이 십분 발휘될 주제겠구나 하는 면도 있고,

한국의 중국학자가 쓴 중국통사가 나올 때가 이미 지났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독자적인 시점으로 중국사를 꿰는 책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납니다.

민두기 선생도 그 일은 못하셨죠.

그 다음 세대와 요즘 신진들은 논문 쓰기 급급해서 더 요원해 보이고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을 구하는 곳이 많으니, 일단은 물러나 있겠습니다.

 

한국도 무척 더운 모양이더군요.

늦여름,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빕니다.

 

-이병한 드림

 

 

 

이 선생과 주고받는 메일을 얼마 전부터 감춰놓고 지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배경도 모르던 통신 초기에는 감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대면도 하고 주변 사정도 조금씩 알게 되면서는 메일에도 프라이버시가 조금씩 스며들게 되어서... 감춰놓고 얘기하는 게 편하게 되었죠. 

 

오늘 받은 메일에는 드러내기 불편한 내용은 별로 없고, 이곳 손님들께 보여주고 싶은 내용은 많고 해서... 이 선생과 따로 의논 없이 올려놓습니다. 두어 줄만 가려 놓았습니다.

 

싱가포르 얘기를 이 선생이 건드렸는데... 제가 종북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글에서 싱가포르를 들먹였었죠. 세습에도 좋은 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해방일기 중 좌우합작을 살펴보면서 리콴유의 공산당에 대한 태도가 더러 생각에 떠오르기도 했죠. 그것도 한 번 써먹었으면 좋을 걸 그랬다.

 

"밖에서 본 중국사"는 얼마 전 이 선생이 권해준 작업입니다. "해방일기" 이후의 작업에 대해 지난 연말 이래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온 것이 모두 한국현대사 범위였기 때문에 중국사로 돌아가지는 않게 될 것 같다고 일단 대답은 했는데, 역시 제 입맛에 맞는 권유이긴 하죠. 완전 개인 취향의 중국통사로 몰고 가면서 "밖에서 본 중국사" 간판을 내걸 전망을 세울 수 있다면 매우 솔깃한 일거리입니다.

 

집중적 일거리로 "남북관계론" 생각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사 열전"은 집중적 일거리가 아니라 은퇴상태의 취미생활 모델로 생각하는 거죠. 언제까지 얼마만큼 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다른 할 일 없을 때 슬슬 하는... 뜨개질 같은 거죠. 그런데 이번 강연 원고로 정리하고 있는 "21세기 민족주의"의 이론적 바탕인 '탈근대론'을 남북관계 제반 현안에 적용시키면 우리 사회의 그 방향 시각을 넓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