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선생님,

새해도 1/3이 훌쩍 지나네요.

지난 편지글은 깊은 공감 아래 잘 읽었습니다.

 

요즘 제 글에 무리수가 없지 않았나 봅니다.

바로 잡고 논거를 보완해야 할 '헛발질'이 있었던 것이겠죠.

기실 편지 보내신 같은 날, 백영서 선생님도 편지를 주셨어요.

베이징과 도쿄에 출장갔더니, 제 글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헌데 반발 내지는 반감이 적지 않더라, 고.

'비판적 중국학'의 긴장감을 잃지 마라는 충고를 보태신 것을 보면,

중화질서 재평가 등의 주장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장은 강양구 기자의 과감한 제목 달기의 선입견이지 하며 억울하다가도,

강기자가 그런 제목을 붙이는 것도,

또 독자들이 적잖이 불편함을 토로하는 것도,

제 글 안에 그런 요소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겠죠.

나이 어린 것 믿고 말 막하지 말고, 숨을 고르자 하던 차였습니다.

 

 

사회를 평가하는 새로운 잣대의 필요성에 대해서 십분 공감합니다.

특히 '민주주의' 조차도 상대화하시는 '파격적인' 관점에 크게 배웠고요.

그 파격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발설하다가, 자충수를 두지 않았나 곱씹어 보곤 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진즉부터 있었고 지금도 역력하지만,

'민주주의'야말로 근대의 최후의 신화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태초의 말씀'이라도 되는 듯, 믿고 따라야 하는 불문율이 되었다고 할까요.

최장집 선생 주장처럼 '정당 민주주의'가 제대로만 되면 작금의 나라/세계의 위기가 해소될 것인지,

과연 그런 역할모델이 될 만한 곳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의아심이 들곤 합니다.

또 그 반대편의 논자들처럼 제도 밖의 운동 정치를 강조하는게 정답 같지도 않고요.

오히려 물신화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 것 아닌가,

작년부터 선생님과 교신하며 '화두'처럼 붙들고 있는 생각입니다.

 

건강, 도 민주주의를 재고할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 같습니다.

저도 요즘 뜻하지 않게 백여년 전에 나온 글들을 종종 읽어봅니다.

조선이, 청이 붕괴되던 무렵에 유학자들이 쓴 글들이 무척 재미나더군요.

그 중 '의병장'이라 칭해지던 의암 유인석의 <우주문답>이 기똥찼습니다.

평등이라 함은 질서가 없어지고, 질서가 없어지면 어지러워진다.

자유라 함은 사양하지 않고, 사양이 없으면 다투게 된다.

자유와 평등이 사람을 거리낌 없게 하고, 모두를 소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결국 나라 안에서는 파당싸움(민주주의), 계급투쟁(사회주의)이고,

나라 간에는 경쟁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자유와 평등이 지속되면 천지가 붕괴될 것이라고 피를 토하던데,

그의 논설 안에 담긴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딱 100년 후 오늘을 보노라면 시대착오는커녕 '예언서'처럼 읽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간 믿고 따랐던 근대적 가치와 이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니,

번쩍-하다가도, 얼얼-하기도 하고.

또 저는 어느 수준에서 소화를 하고, 글로 풀어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네요.

누군가는 저더러 '포스트모던 파시스트'라고 독설을 뿜던데,

그런 극언을 접하면 절로 주저함이 일거든요.

포스트모던은 맞는데, 그 출로가 파시즘이라니...

'된장맛 포스트모던'을 할라쳐도, 복고니 퇴행이니 중화주의의 혐의도 따르고...

쉽지 않습니다.

 

 

'건강'이라는 기준이 유난히 반가웠던 것은,

제가 이번 쿼터에 청강 삼아 듣는 대학원 세미나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 제러드 다이아몬드, 라고 귀에 익으신지요?

<총, 균, 쇠>, <문명의 붕괴>, <제3의 침팬지>  등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UCLA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 증의 한 분이니,

이 곳 떠나기 전에 직접 얘기나 들어보자 해서 들어갔지요.

헌데 세미나 방식이 매우 독특합니다.

이 분이 신기하게도 의대 소속이에요.

거기에 생물학과 교수와 역사학과 교수가 합류했지요.

의학, 생물학, 역사학이 '통섭'하여 세미나를 꾸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1/3은 개미나 꿀벌 등 다른 생물들의 '사회'를 배우고,

1/3은 수렵-채집문명과 농경문명을, 마지막 1/3은 산업문명 이후를 다룹니다.

그래서 인류가 지금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혹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를 공부하는 셈입니다.

물론 세미나의 질은 좀 실망스런 구석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 전공의 학생들이 잘 융합하지 못하더라고요.

차라리 세 분이 공동으로 학부 수업을 하면 더 생산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입니다.

 

이런 당장의 경험에,

선생님도 의사들과도 얘기를 나누며 전망을 다듬어 보고자 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당장은 그런 건강사관으로 풀어내는 한국사는 어떤 모양일 것인가 궁금증도 일고,

또 더 나아가서는 내가 아예 멍석을 깔아들여 볼까? 하는 생각도 생깁니다.

역사학자와 동/서 의학자 간의 서신 교환 같은 것을 연재하면 좋겠다! 싶거든요.

 

 

소개해 주신, 이븐 할둔은 귀동냥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참에 읽어보려고 책도 모아두었는데,

검색해 보니 그 중 한 권은 김호동 선생이 번역하신 적이 있더군요.

이미 절판되었지만요.

요즘엔 이럴 때도 기획거리로 생각이 튑니다.

절판된 책, 오래된 글을 디지털 공간에서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종이책처럼 판권의 제약을 덜 받으면서도, 좋은 글을 더 널리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동아시아로 범위를 좁혀도, 반복되는 일이 많습니다.

최근 일본과의 역사 분쟁 등도 그렇지요.

그럴 때 꼭 새 글이 옛 글보다 더 낫다는 법은 없는 것 같아요.

지나간 주옥같은 글들을 재편집하고 재배치만 해도, 훨씬 생산적인 의미를 낳을텐데.

기실 이것이 '술이부작', 혹은 '집대성'이 아닌가.

디지털-동학을 표방하는 매체가 시도해볼만한 방법 아닐까.

동방의 옛 학술 방법을 서방이 전해 준 새 매체에 옮겨 되살린다.

 

한동안 '반전시대'라는 이미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서에서 동으로, 신에서 구로.

그런데 이런 생각도 여전히 동/서, 신/구의 구도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이미 100년간 서구의 신문명을 동아시아처럼 열심히 배운 장소도 없고요.

단순히 반전만은 아닐 테이고, 그러하면 더 적절한 표현은 뭘까 하다가,

요즘은 '중흥'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복고를 통한 창신을 중흥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국가, 건강한 역사의 중흥을 꾀하자.

 

두서없이 길게 늘어 놓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평안하고 건강하시길 바라며-

 

-이병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