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이란 책을 낸 최종고는 그 무렵 “제14회 이승만포럼”에서 같은 제목의 발표를 했다. 그에 관한 기사를 보고(<뉴데일리> 2012년 4월 8일 “여류시인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재발견”) 나는 그 책을 구해 보지 않기로 했다.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모윤숙이 활동했던 당시 해방은 됐지만 나라의 세움에 대해 근원적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서 유엔의 도움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좌익과 우익의 갈림에서 중재를 맡아 줄 사람이 없었다.

 

유엔은 ‘조선위원단(또는 한국위원단)’을 대한민국 건국을 돕고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1948년 1월 국외국가의 대표 60여명을 서울에 파견한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 단장을 맡은 메논은 한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인적 교류를 펼쳤고 문학적 식견이 높았던 메논은 모윤숙 시인과 가까워졌다.

 

이승만 박사를 돕던 모윤숙 시인은 유엔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메논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민간외교를 펼쳤다. 모윤숙은 정치적인 주제를 통하지 않고 문화적 접근을 통해 외교적 역량을 펼쳤다.

 

그간 모윤숙과 메논의 민간외교를 스캔들 정도의 가십으로 다뤄졌지만 최 교수는 “직접 인도에 가서 메논에 대해 연구하면서 모윤숙과의 관계를 단순히 연분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뉴델리에 있는 네루기념도서관에서 10일간 메논관련 서적을 연구한 결과 모윤숙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고 새로운 사실을 설명했다.

 

최종고 교수는 이승만 박사와 모윤숙이 메논에게 펼쳤던 외교를 다시금 파악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비사를 파고들었고 여성들로 구성된 외교사교단 ‘낙랑클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낙랑클럽은 영어를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사교단체다. 총재는 김활란이었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으로 150여명 정도가 한국의 문호를 알리는 사명을 띠고 민간외교단을 자청했다.

 

이승만 박사의 후원을 받아 운영됐던 낙랑클럽을 통해 최 교수는 “한국여성의 건국운동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며 “과거 일본이 1860년대 메이지유신으로 처음 서양에 개방될 때 서양인들의 마음을 잡으려 여성들을 동원해 춤도 추고 접대도 했는데 낙랑클럽은 일본의 방향과는 달리 여성 문인들이 주도해 문학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외교를 펼쳤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주제에 대해 정경모는 2009년 6월 15일자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에 이렇게 쓴 일이 있다.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사람이 메논 단장 아니오이까. 그런데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됐소이다.

 

메논의 돌연한 변심에는 시인 모윤숙의 미인계가 주효했던 까닭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윤숙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오이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 자신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런던)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의 치정 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국립대학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소이다.(<씨알의 힘> 제9호 1987년 10월)

 

최종고는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활동을 “문학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외교를 펼쳤던 것”으로 파악한다고 했다. 개항 초기의 일본에서 여성을 동원해 서양인과 춤도 추고 접대도 하게 했던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최종고 자신의 감각이 고상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매춘’으로 보일만한 행위에서도 문학적-문화적 의미를 찾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숙희가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정우사 펴냄) 117-118쪽에서 설명한 낙랑클럽은 최종고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전숙희는 여류문인으로서 낙랑클럽 핵심멤버들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낙랑클럽의 활동에 정말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있었다면 포착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남한의 우파 정치인들과 친분이 두텁던 모윤숙이 주동이 되어 발족한 낙랑클럽은 미군 고급 장교와 한국 정치인을 상대한,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 클럽이었다. 고구려 시대 낙랑공주와 같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성들만이 선택되어 입회되었던 것이다.

 

미군을 만난다지만 상대는 미 군정청의 실력자들인 장성급, 고급장교에 한정되었고, 남한에 들어와 있던 각 나라 외교관과 유엔 산하 각종 단체장이었다. 사교적인 파티에 참석하여 그런 외국인들로 하여금 남한에 호의를 갖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화 출신을 중심으로 한 달 만에 1백여 명이 낙랑클럽 회원으로 지원했다. 그들 중에는 정부가 수립되고 장관급에 오른 주요 정치인의 부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회현동에 있던 모윤숙의 집에 회원들이 모였으나 미 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정치인이 주선하여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았다. 회원들이 그 저택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클럽 운영의 리더였던 모윤숙은 사교적인 호탕한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위트와 유머 섞인 이야기로 대부분 이화 후배인 회원들을 사로잡았고,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했다.

 

이 책의 “책머리에”에서 전숙희는 “수임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했다. 이강국의 애인으로 미군정 간부와 동거하다가 간첩죄로 체포되어 처형된 김수임의 실존을 ‘비극적 사랑’의 관점에서 부각시키겠다는 뜻이다. 김수임의 활동무대로서 낙랑클럽을 설명하는 전숙희의 입장에서는 낙랑클럽의 성격을 비하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전숙희는 낙랑클럽을 기지촌에 비교했다.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라 한 것은 신분의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며, 성격에서는 기지촌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책 속에서 모윤숙과 김수임의 모습은 고급매춘부로 그려져 있다. 김수임이 베어드 헌병사령관과 가까워지는 과정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베어드의 집에 두 사람이 저녁 초대를 받아 간 장면이다. (131-132쪽)

 

분위기가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사령관은 식사가 끝나자 일어나 음악을 틀었다. 진도아리랑이 아리, 아리랑 하고 흥을 돋우었다. 모윤숙도 분위기를 바꾸려고 먼저 일어나 한국춤을 추었다. 모윤숙은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반짝거리는 남색 목도리를 잡아당겨 김수임에게 훌쩍 던져주며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전축 옆에 서 있는 사령관의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부르며 두 팔을 폈다 돌렸다 하며 둘이서 돌아갔다. 사령관도 아리랑만은 익숙한 솜씨로 장단을 맞춰가며 춤을 추었다.

 

김수임이도 양복을 입어 망설이고 있다가 윤숙언니가 던져준 보자기처럼 넓은 목도리를 두 손으로 펼쳐들고 마주 나와 합세했다. 길고 짧게, 또 흥겨웁다가도 서러운 가락에 세 사람은 어깨춤을 추어가며 가락에 맞추어 흥겹게 돌아갔다.

 

춤이란 참으로 인간 근본의 기쁨인가보다. 음반에서 아리랑이 끝나자 사령관은 흥이 꺼지기 전에 분위기를 바꾸어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중 “축제의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식탁에서 조그만 잔에 남은 ‘크림 디 맨트’를 절반씩 부어서 돌린 다음 그 잔을 비우자, 세 사람이 둥글둥글 함께 춤추며 돌아갔다. 한 잔의 술과 춤은 어색했던 방안 분위기를 금방 돌려주었다.

 

김수임은 자기가 주인공이나 된 듯이 평소에도 잘 부르던 “축배의 노래”를 마음껏 신나게 부르며 술잔을 사령관과 부딪치기도 하고 나비처럼 온 방안을 춤추며 돌아갔다. 음악이 끝나자 숨이 찬 세 사람은 소파에 몸을 던지고 자기들끼리 손뼉을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기쁨이 온 방안에, 세 사람의 가슴 속에 넘쳐났다. 순간 세 사람의 마음의 벽도 다 허물어져 한마음이 되는 듯했다.

 

최종고는 이런 장면에서도 “문학적-문화적 교류”만이 눈에 들어올까? 그럴 리야 없겠지. 글쓴이가 ‘문화’보다 ‘사랑’을 내세운 장면이니까.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 ‘사랑’ 아닌 ‘욕정’을 떠올리는 것은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일까?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김수임의 진정한 사랑은 이강국이라는 사실을 전숙희는 확신을 갖고 말해주니까.

 

‘낙랑클럽’이란 이름부터 참 고약하다. 우리 역사 초창기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낙랑’이다. 해방 조선에서 외국인 접대를 목적으로 모인 엘리트여성 집단이 하필 ‘낙랑’이란 이름을 쓰다니. 2천 년 전 토착문화보다 우월한 중국문명을 이민족 지배 아래 누리던 ‘식민지 낙랑’이 이 집단의 소망이었다면 더 할 말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낙랑’과 ‘여성’이 합쳐질 때 바로 떠오르는 ‘낙랑공주’의 이미지다. 이웃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 데 목숨 바친 ‘미친 년’ 아닌가. 정말 ‘문학적-문화적 교류’가 이뤄져 낙랑공주 설화를 알게 된 외국인이라면 낙랑클럽 멤버의 환대를 받으면서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았겠는가.

 

낙랑클럽과 모윤숙의 이름이 유엔조선위원회에 대한 로비활동으로 회자되는 것은 ‘매춘’의 선정성 때문이다. 나는 모윤숙의 성적 매력이 한국현대사의 전개방향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 중국고대사에는 말희니 달기니 포사니 하여 지나친 성적 매력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여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는데, 대중적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십여 년 전 IMF사태 속에 그 생각을 한 번 적은 일이 있다.

 

“양귀비의 누명”

 

양귀비(楊貴妃)는 중국에서 미인의 대표이자 사치와 퇴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옷을 짓기 위해 비단 짜는 사람과 재단하는 사람을 천여 명씩 궁중에 뒀다는 둥, 유모 수백 명에게서 짠 젖으로 목욕을 했다는 둥, 그녀의 전설은 황당하고도 화려하다. 아편을 내는 풀의 요염한 꽃을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 상징성의 압권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당(唐)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한 책임자로도 지목된다. 원래는 영명한 황제였던 현종(玄宗)을 미혹시키고 민간에까지 사치와 음일의 풍조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촉(蜀)땅으로 몽진(蒙塵)할 때 성난 군사들이 현종을 핍박해 양귀비를 죽이고야 어가(御駕)를 계속 모셨다고 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중국에서는 나라 하나 망쳐야 미인 축에 드는 전통이 있었다. 하(夏)나라 걸(桀)임금, 은(殷)나라 주(紂)임금이 말희(末姬)와 달기(妲己)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 하고, 뒤이어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동쪽으로 쫓겨간 것도 포사(褒姒) 때문이라 한다. 나라가 망했을 때는 무조건 요사스러운 여자를 이유로 갖다 대는 것이 편리했던 모양이다.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현종 이래 당나라의 쇠퇴를 무력(武力)국가에서 재정(財政)국가로의 국가성격의 변화로 설명했다. 경제적 번영의 결과로 중세적 징병제인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집권력의 군사적 근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방의 군사세력인 절도사(節度使)의 발호가 당 후기를 주름잡은 사실로 보면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원인을 일개 여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오늘의 상식으로 보아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유교사회에서는 이런 설명이 그럴싸하게 통했다. 사실 큰 일이 있을 때 손쉬운 대상을 지목해 죄를 씌우는 일은 흔하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칸토(關東)대지진 때의 조센징이 그런 예다.

 

오늘날의 금융파탄사태를 놓고 일반국민의 소비풍조를 규탄하는 일이 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물론 그 동안 사치와 낭비가 지나친 감이 있고 웬만큼 억제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의 잘못이 분명한 일을 놓고 애매한 국민을 너무 탓하면 진정한 책임의 소재가 흐려질 염려가 있다. 난세가 양귀비를 있게 한 것이지, 양귀비가 난세를 불러온 것이 아니다. (<미국인의 짐> 171-172쪽)

 

낙랑클럽의 활동은 당시 조선의 유산계층을 배경으로 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펼친 로비활동의 일환이었다. 반공-반탁을 간판 삼아 분단건국을 추진한 그 세력은 풍부한 재력을 비롯해서 자기네 목적을 추구하는 데 동원할 자원을 많이 갖고 있었고, 낙랑클럽은 그중 일부였다. “이성이 심정에 의해 흔들렸다”는 메논의 회고는 사랑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그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통념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양식이 뇌물에 의해 마비되었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았다 해서 뇌물의 작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몸까지 바치는 판에 재물이라고 아낄 리는 없었으리라고 짐작해 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