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전기주식회사(경전) 노동조합이 회사 측의 인사이동 명령에 항의, 전차 운행 거부를 시작한 것은 1월 19일부터였다. 노동부가 중재에 나서서 22일부터 운행이 재개되었고, 쟁의 사안은 22일 오후 회사 내 노자위원회를 열어 처리하기로 했다.

 

“인사 재심사 조건으로 경전 태업 문제 일단 해결”

 

160만 서울시민의 발이라고 하는 경전 전차 1백35대가 경전당국의 사원에 대한 인사이동문제를 계기로 19일부터 태업을 계속하여 화제와 관심을 사회에 던지게 하더니 21일 하오 노동부의 알선으로 경전 당국자와 태업종업원 대표들이 모이어 신중 협의한 결과 22일 아침에 20여 대 정오에 70여 대의 전차운전을 보게 되어 서울 시민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였다.

 

경전 당국에서 9명의 사원을 본래의 부서에 다른 부서로 이동 발령한 인사문제가 부당하다고 하여 2백59명이 연명 사직을 결의하고 사표를 제출하게 되자 동사 운수부 직원 전체의 문제로 파급되었던 것으로 21일 노동부장의 알선으로 전기 2백59명의 사표는 회사에서 수리하지 않기로 하는 동시 이동 발령된 9명에 대하여서는 다시 그 이동의 사정을 경전 노자위원회에서 재심사 후 결정할 것을 조건으로 22일부터 일부 전차가 취업하기로 된 것으로 22일 노자위원회에서 원만 협조를 보게 되면 23일 아침까지에는 1백35대가 운전될 것이며 이번 문제의 해결 여하는 남조선의 노동운동과 노사협조에 대한 새로운 발전적 전례를 만들어 줄 것으로 각 방면의 관심과 기대는 참으로 큰 바 있다.

 

▷대한노총 경전조합 담: 이번 태업문제에 관하여서는 21일 하오11시 노동부와 경전당국 대로 3자가 회합하여 타협한 결과 이번 인사이동에 관한 사령을 철회하고 이 문제를 노자위원회에 회부하여 22일 하오 1시 동 위원회를 열어서 가부를 심사 결정할 것을 조건으로 22일 상오9시까지 사표를 제출한 2백60명이 취업할 것을 수락하였는데 만약 이번 노자위원회의 조정 결과가 우리의 요구조건에 적합치 아니할 때에는 우리의 정당성과 경전 측의 회오 반성을 주장하여 여전히 총사직을 단행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23일)

 

경전의 뿌리는 1898년 설립되어 이듬해 전차 운행을 시작한 한성전기회사에 있었다. 미국인 출자로 시작된 한성전기를 일본인이 장악하고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경전은 1961년 한국전력주식회사(한전) 설립에 흡수되면서 그 주축이 된 회사였다.

 

5천 명 직원을 가진 경전은 해방 당시 철도부문에 이어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사업이었다. 당연히 노동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한 현장의 하나였다. 1947년 초까지는 경전에서도 전평의 세력이 강했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이후 미군정의 전평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진한이 이끄는 우익 성향 대한노총이 경전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합 선정의 경전 투표결과”

 

공보부 발표에 의하면 19일에 거행된 경전 종업원 조합 선택의 투표결과는 유권자 4291명 중 3805명이 투표하였는데 대한노총을 희망한 자 3260명초합이 필요치 않다고 기입한 자 394명 백지투표 151명이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22일)

 

이 무렵 대한노총의 경전 장악이 어떤 분위기에서 이뤄졌는지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원효로에 불상사”

 

29일 오후 4시20분경 시내 원효로4가 경전 가스제조소 부근에서 전평원 10명이 우익 청년단체를 비방하는 삐라를 붙이는 것을 목격한 전 대한민청 용산지부장 김영만 외 20여 명은 전기 10명을 원효로2가 대한민청 사무실로 납치한 후 구타를 가하여 1명 중상 9명 부상의 불상사를 내었는데 가해자 김 외 5명은 동일 오후 6시경 용산서에 검거되었으며 피해자는 이홍식 외 9명으로 판명되었다. (<경향신문> 1947년 5월 1일)

 

성한표는 “9월 총파업과 노동운동의 득세”에서 대한노총의 득세 과정을 서술하던 중 경전의 조합 선택 투표를 언급했다.

 

전평은 [1946년] 9월과 10월에 걸쳐 지도자가 대량 검거됨으로써 주직중추가 붕괴되었다. 8-15 후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던 전평의 붕괴로 이 땅에는 한때, 사실상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운동’의 공백상태가 찾아왔다. 이 공백을 메워나간 것이 대한노총이다. 그러나 전평의 조직중추가 무너졌다고 해서 대한노총이 일사천리로 진입해 들어갔던 것은 아니다. 검거의 선풍 속에서도 피해나온 하부조직의 활동가들 일부는 여전히 현장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

 

그러나 철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문에서 대한노총의 진출에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광산부문에서는 전평의 불법화가 선언되기[1947년 6월] 전에는 대한노총의 진출이 극히 지지부진했다.

 

철도노조와 더불어 전평의 강력한 거점으로 알려지고 있던 경전에서의 대한노총 진출은 1947년 3월의 총파업으로 전평조직이 다시 한 번 큰 타격을 입은 후에야 노동부가 ‘숨겨둔 카드’를 내놓음으로써 실현되었다. 노동부의 ‘숨겨둔 카드’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종업원의 투표에 의한 노조 선택’ 제도였다. 이러한 카드는 “종업원들이 투표로 선택한 노조에 대해 독점적인 단체교섭권을 준다”는 ‘선물’과 함께 제시되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2> 441-442쪽)

 

경전 종업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한노총을 선택했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경전 장악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1947년 7월 25일의 한 사건에서 알아볼 수 있다.

 

“경전 종업원 사건”

 

25일 오후 4시30분경 시내 을지로 경전 본사에서는 운수과를 제외한 각과의 종업원대회가 있어 이 자리에서 24시간 파업 관계로 파면된 375명의 복직 등을 비롯한 수개 조 요구조건을 결의하고 나오는 종업원을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 단체원 수십 명이 테러를 감행하자 부근은 일대 소동을 일으키게 되어 중경상자 다수를 내고 MP CIC 경찰 등의 출동으로 해산되고 종업원 1백여 명이 무허가집회라는 이유로 중부서에 검거되었다. (<경향신문> 1947년 7월 27일)

 

경찰 출동이 테러 때문이었는가, 종업원대회 때문이었는가? 테러를 감행한 “모 단체원”의 검거 이야기는 없고 종업원들이 ‘무허가집회’로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만 있다. 1947년 3월 23일의 총파업으로 종업원의 10퍼센트 가까운 375명이 해직되었다면 이것은 노동운동의 ‘지도부’만 제거된 것이 아니다. 적극적 운동가 모두가 제거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조 선택’ 투표가 행해진 것이었지만, 종업원 대다수는 375명의 해직이 부당한 것이었다고 4개월 후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한노총이 진정한 노동조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박지향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945~1950”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한노총은 1947년 말 현재, 12개 산업 2911개 지역노조에 걸쳐 조합원이 85만 명에 달한다고 보았으며, 1948년 1월에는 조합원이 100만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대한노총의 실세를 1947년 9월 현재 조합원 약 9만 명으로 추산했다. 대한노총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하나같이 비판적이었다. 한국소위원회는 대한노총이 조사 당시까지 조합원들에게서 회비는 거두지 않은 채 정치인 및 기업주들한테 재정지원을 받아왔고 사용자와 교섭을 벌인 증거도 없다는 점을 들어 대한노총을 “사이비 노동단체”라고 규정짓고 이 단체의 “유일한 목표는 노동자들을 정당한 노동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소위원회는 더 나아가 대한노총이 실상 정치단체이므로 정당 등록을 강제하고 있는 군정법령 제55호 위반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앞으로의 법령에도 그러한 사이비 단체의 성립을 저지하는 보호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권유했다.

 

미첨이 조사한 바로도 대한노총은 주로 감독이나 십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노동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다. 부산의 한 방직회사에서는 사장이 노조위원장이면서 회사 청년단 단장이라는 희극적인 사례도 있었다. 대한노총이 노동조건 개선 등을 시도했다는 사례는 거의 없었으며 1947년 9월 현재 그들이 주도한 파업도 전혀 없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 132-133쪽)

 

경전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청년단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부딪치는 현장이기도 했다. 1948년 1월 23일자 각 신문 광고란에는 큼직한 성명서 두 개가 나란히 실렸다. 하나는 “대동청년단(대청) 총본부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검찰분과위원회 위원장 차종연 외 5천6백 명”의 명의였고 또 하나는 “대동청년단 경전특별지단 단장 김기하 외 3백50명” 명의로, 대청을 탈퇴하여 서북청년회(서청)의 깃발 아래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1947년 4월 귀국한 광복군 지도자 이청천(지청천)의 명성을 발판으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해 1947년 9월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통합 수준이 낮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청은 대청 출범을 앞두고 통합파와 잔류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광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1947년 7월 25일 경전 종업원대회에 관한 앞의 기사에서 이 대회가 운수과를 제외한 것이었다고 했는데, 운수부가 경전 중 정치색이 가장 강한 부서로 대한노총 등 우익세력이 장악한 곳이었기 때문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47년 5월 8일자 <경향신문> “시정수감(市井隨感)” 난에 전차서비스의 문제점을 지적한 김동인의 글 “전차”를 보면 경전 운수부 전차과에 할일 없는 직원이 무척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앞부분만 옮겨놓는다.

 

진주(晋州)에는 파리(蠅)의 수효보다 기생의 수효가 세 마리 더 많다는 말이 있거니와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는 순경과 전차종업원의 수효가 분명 파리보다 더 많다. 거리에고 골목에고 나서면서 둘러보면 순경 몇 명과 전차종업원 몇 명의 모양은 꼭 눈에 띈다.

 

어떻게어떻게 하여 간신히 부비적거리어 전차에라도 올라타면 그 만원전차 안에는 전차종업원이 열 명 가까이 순경이 대여섯 명 이상은 전차마다 빠짐없이 반드시 타고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한 전차에는 운전사 한 명 차장 한 명만 있으면 되는 XX다. 그런데 해방 후의 서울 전차에는 반드시 5, 6명 내지 7, 8명의 XX승무원인지 앞뒤에 둘러 타고 있어 가뜩이나 좁은 차를 더욱 좁히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

 

집단항의를 불러온 운수과 직원 9명에 대한 1월 12일자 이동 발령은 운수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회사 측 시도였던 모양이다. 노동부 중재로 이 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경전 노자위원회가 1월 22일 열렸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중앙노무조정위원회로 넘겨졌다.

 

“결국 노무조정위원회로 회부”

 

인사문제는 노자위원회에 회부한 채 우선 전차만 완전히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이로써 23일 12시 현재로 전차는 134대가 운전되어 있다 한다. 그러나 인사문제는 22일 오후 1시 경전 본사에서 개최된 노자위원회에서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문제는 결국 중앙노무조정위원회로 회부되었다 하는데 3일간의 파업으로서 경전에서는 백수십만 원의 수입이 감소되었을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4일)

 

노무조정위원회의 판정은 1월 30일에 나왔다.

 

“쌍방 합의는 언제, 경전 인사문제는 상미해결”

 

경전의 인사이동 문제는 중앙노무조정위원회에 회부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동 위원회에서는 쌍방의 의견을 절충하여 30일 이에 대한 판정을 나리었는데 판정은 결국 조합 소속으로부터 본사로 전출하는 9명에 대한 사령은 취소하기로 되고 간부 사직 등에 대한 2조항은 기각하였다.

 

한편 본사로부터 전차과로 전임하기로 된 9명은 그대로 시행하기로 되었다 한다. 전기 판정에 대하여 노조 측에서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간부사직 등을 주장하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양측의 의견을 들어보면 각각 다음과 같다.

 

▷경전본사 담: 노자쟁의에 대한 최고 판결은 중앙노무조정위원회인 만치 본사에서는 부득이 그 명령에 복종할 밖에 없다.

 

▷대한노총위원장 전진한 담: 이번 판정으로서 인사이동이 법적으로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니 부당한 인사문제로 인하여 일반에게 고통을 끼치게 한 배후조정자의 퇴진을 요구하며 우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굴복하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예속하게 될 것이므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하여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

 

▷경전노조위원장 정대천 담: 전입자 9명은 4개월 내지 8개월의 재사 경험 밖에 없으므로 전차업무의 능률 저하와 또는 직장혼란의 결과를 야기시킬 것이므로 전기 9명의 전차과로 전입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것은 자파세력을 부식시키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31일)

 

“경전 인사문제 쌍방 태도 강경”

 

경전의 노자쟁의는 지난번 노동부 노자쟁의위원회의 판정으로 해결을 본 감이 있었으나 노조 측에서는 아직 만족지 못하다 하여 각계 요로 당국에 간부 사직 등을 진정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경전 본사에서는 수일 전에 중역회의를 열고 전번 태업시 방관 혹은 방조한 본사 내의 일부 간부에게 사규를 위반하였다 하여 사직하기를 권고한 일도 있다 하여 문제는 또다시 점차 악화의 일로를 걷고 있다 한다.

 

이에 본사 측의 말을 들어보면 노조 측에서 암암리에 간부 사직 등을 각계에 진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노동운동이라 할 수 없으며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며 노조 측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노동자에게 폭군처럼 군림하고 있는 현 간부 밑에서는 불안과 공포로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여 쌍방에서 서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7일)

 

간부 사직 운동의 표적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좋은 글을 많이 남겨준 오기영이었다. 오늘 이야기가 이미 길어졌지만, 이 상황에 대한 그의 해명은 들어봐야겠다.

 

“인욕(忍辱)”

 

요즈음 나는 가위 명진사해(名振四海)라 하게끔 유명하여졌다.

 

서울 시민이면 소학교 아동으로부터 남녀의 구별이 없이 매일같이 타야 하는 그 전차가 벌써 일주일이나 파업을 하였는데 거리의 벽보마다 신문마다 악질간부 오기영 등의 추방 목적을 관철하기까지 전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한다.

 

타야 할 전차는 움직이지 않으니 곯는 것은 죄 없는 시민이다. 하다면 이 죄 없는 시민이 불의의 교통난에 빠져서 문제의 핵심은 여하간에 우선 전차 파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냐 할 때에 오기영이라는 이름이 누구의 입에서나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전차 타기가 한참 힘들던 작년 5월에 나는 아주 온당한 계산으로서 경전이 시민에게서 먹는 욕은 하루에 십만 마디는 되리라 하였더니 이번에는 전차가 아주 없어져 버렸으니 그보다 훨씬 더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필귀정을 기다리고 참았지 별수가 없는 일이다. 여기는 인욕이 필요하다.

 

나같이 수양이 부족한 인물로서 인욕은 용이한 것이 아니지마는 그래도 달고 치면 맞았지 별수가 없는 일이다.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야 한다.

 

하기는 경전생활 3년에 나는 많은 욕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모두 참고 견디어야 하였다. 지금 조국재건의 진통기에 있어서 이 혼란을 극복해야만 한다면, 그렇고서만 신생의 조국을 볼 수 있다 하면,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면 일제하의 옥고와 고형(拷刑)도 견디었으랴. 더 참는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겪은 여러 가지의 욕스러운 사태에 나는 ‘시가인야(是可忍也), 숙불가인(孰不可忍)’이냐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면 이러한 경구는 도리어 방해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뒤집어서 나 자신을 격려하여 왔다. ‘시불가인, 숙가인야(是不可忍, 孰可忍也)’냐고.

 

노동운동을 한다는 영웅들이 스탈린 이상의 혁명의욕을 이 경전 직장에서 날마다 용감스러운 솜씨로 발휘하였다.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더니 이들은 7시간 노동을 주장하여 정각 한 시간 전에 수위로부터 종을 뺏아서 땅땅 치고는 종업원들을 내몰았다.

 

소련서도 스탈린과 사동은 그 국가에서 받는 보수에 차등이 있는 것이라고 타일러도 이들은 사장과 사동의 동등 대우를 요구하며 이것을 안 듣는다고 나는 옥상에 끌려가 인민재판을 두 번이나 겪었던 것이다. 회사의 정문, 후문을 막아버리고 각 사무실에 있는 직원을 옥상으로 강제집합을 시킨 뒤에 나를 끌어가는 것이다. 그 다음의 광경에 대해서는 나는 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 뒤에는 또 한 번 운수부 전차과 집합실에서 천여 명 포위 중에 감금된 일이 있다. 전재동포를 위하여 월 25원씩 두 달 동안 내자는 회사 방침을 반대한 것이다.

 

이 전차과 집합실에서는 김구 선생을 모셔다 놓은 기회를 이용하여 사장을 포위 감금한 일도 있었다. 다만 나의 경우와 다른 것은 전자는 ‘파괴적 적색분자’의 책동이요, 후자는 ‘민족진영 건설파’라는 것이 다른 것인데, 방법과 인물은 비슷비슷하니까 묘미가 있다.

 

작년 3월에 나는 수 년 간의 독신생활을 집어치우고 결혼하였다. 가난한 살림이라 별수 없어 피로연은 이다음 독립한 뒤에 하기로 하였고 회사간부 수 씨와 그밖에 친지 6, 7명으로 십 수 명의 가족적인 만찬을 차린 일이 있다. [오 씨 결혼은 1947년 3월 15일(<경향신문> 1947년 3월 13일)]

 

그런데 이 자리에 곤봉 가진 수십 명이 달려들었다. 대한노총의 거두들이다. 우리는 밥을 굶으며 직장을 지키는데 너희는 술만 먹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나를 배척하는 파업 이유의 하나라 하거니와, 그 뒤 운수부장 서정식 씨는 기어이 이들의 곤봉에 난타되어 만 3개월 이상을 와석신음하였다.

 

나는 작년 8-15의 서울 기념 광경을 시골 계신 칠십 노모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어머니를 모시러 시골을 내려갔다. 그때 마침 좌익에 모종 대사건이 있다 하여 검거선풍이 불었는데 기민한 책략자들이 ‘빨갱이 오 부장’은 체포령이 내려서 피신하였다고 하였다. 이래서 또 애꿎은 비서과정을 납거(拉去)하여다가 나의 행방을 대라고 두들기게 하였다.

 

이들은 또 경찰, 검찰청 혹은 미군 수사기관에 여러 가지 무고의 투서를 하였다. 업무횡령 혐의자로 문초를 받을 때에, 천하가 뒤집히기로 내게 이런 피의가 당한가고 나는 앙천탄식하였다. 그러나 참았다.

 

공산당에서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초도 받은 일이 있고 박헌영을 감춘 자라는 밀고에 의하여 가택수색을 당하고 나 대신 식모가 따귀를 맞은 일도 있다. 지폐 위조범의 하나로 지목하는 문초도 받았고, 나의 평론집 <민족의 비원.이 공산당 선전문집록이라니 사실이냐는 조사도 받았다. 물론 이것이 다 나를 경전에서 몰아내자는 계략에서 나온 일이다.

 

같은 조선 사람끼리의 문초일 때에는 문초하는 사람은 비록 나를 범죄자처럼 대우하나 그래도 핵변하기가 쉽건마는 외국인에게서야 이것이 용이치 않다. 그들이 나를 알 까닭도 없고 그들은 조선 사람이면 다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알아서 누구나 믿지도 않는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민족적으로 비상한 모욕을 느꼈다. 그러나 참았다.

 

생각할수록 나는 무던히 참아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나는 정말로 ‘시가인야(是可忍也), 숙불가인(孰不可忍)’인가를 생각하여 본다. 이렇듯 폭력과 비행이 횡행하되 이것을 방지하는 도리가 없다 하면 장차 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말재주 있는 사람들이 ‘5천 대 3’이라는 이론을 전파했다. 5천 종업원의 의견이 중하냐, 세 사람의 지위가 중하냐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순진하기 양과 같은 5천 종업원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지금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 양의 껍질을 쓴 이리를 따르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이것이 슬프다. 그들과 더불어 같은 골육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슬프다.

 

진정코 5천 대 3이라면, 아니 2천5백 대 3이라 하더라도, 아니 5백 대 3이라 하더라도 나는 물러갈 것이다. 본시가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거늘, 하고 싶은 고생을 하는 것도 아니거늘 종업원조차 싫다 할 때에 내가 무엇 때문에 있을 건가? 체면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만나는 것은 체면상 좋은 일인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아직 참고 있어야 하겠다. 사악(邪惡)이 물러가기까지 나는 이 직장을 인용(忍辱)의 도장(道場)삼아 좀 더 견디는 수밖에는 없다. 시불가인, 숙가인야(是不可忍, 孰可忍也). (1948. 3. 15. <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68-72쪽)

 

‘빨갱이’로 몰리는 사람들이 1948년 초까지 경전 간부로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며 벌써 2년 전 우익에 ‘결탁’한 금융조합 생각이 난다. 금융조합 교육과장이던 김성칠은 당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1946년 3월 19일)

 

장덕수 씨 등 민주의원 측이 하상용 임흥식 씨 등을 초청해서 공작한 결과 과장회의에서 중역들이 우익과 결탁하기를 선포하였을 때 나는 그 비(非)를 지적하고 두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다시 3월 9일 오후 인민비판사 주최로 좌익 편에서 금융조합 문제를 논의하고 민전, 전평, 전농, 해방일보 등 좌익의 논객들이 금융조합에 공격의 일제 화살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들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을 상대로 세 시간 동안 항변하였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우익 편향은 이제 결정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나는 이 기관을 물러나야겠다. 나는 현하의 조선에 있어서 좌익의 경거망동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익의 혼란도 보기 숭하다. 어느 편으로든 나 자신이 규정받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관에 간부의 일원으로 몸을 담아두는 것도 생각할 문제이다.

 

 

Posted by 문천